읽고 싶은 시 744

겨울 영산홍 / 황동규

겨울 아침 햇살 속에 베란다 영산홍 얼굴들이 달아오른 것을 보며 베그 4중주단이 간절히 연주하는 베토벤 후기 현악4중주를 듣다 불타가 예수에게 말했다. “저런 음악을 틀어놓고야 글이 되거나 그림이 되는 인간들, 누가 인간이 아니랄까봐......” “허지만 결국 선생의 언행은 일단 한심한 인간이 되어봐야 제 삶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보다는 일단 한심 속에 정수리를 담그는 것이 삶의 단초랄까.” 음악에 귀 기울이다가 예수가 말했다. “저 울음을 몸속에 담고 버티는 소리를 들어보게. 저건 이미 한심 밑바닥까지 떨어져본 자의 소리가 아닌가.” 영산홍으로 시선을 돌리며 불타가 말했다. “허긴 죽음에 들켜 죽음을 공들여 만드는 자에게 떨어져보고 안 봄이 무엇이겠는가?” 고개를 끄덕이며 예수가 받았다. “공..

읽고 싶은 시 2014.05.21

부활 / 황동규

죽음도 부활도 다가오는 부활절도 다 삶의 일인데 이따금 속 모르는 추억은 오십 년 전 그대 살던 동네까지 다시 길을 놓건만 봄 가뭄 끝에 흐르다 만 개울까지 그대로 멈춰놓건만 첫사랑은 부활하지 않는고나. 문 앞에서 머뭇대다 나도 몰래 옆 골목으로 새면 쓰다 쓰다 채 못 쓴 편지처럼 진해지고 진해지던 하늘 오늘은 빗방울이 되어 흩날린다. 그렇다. 오랜만에 비 저리 소리 내며 내리는데 비안개 사방에 피어 있는데 마지못해 첫사랑이 부활한다면 잃은 사랑 정성 들여 수놓은 저 여러 필(疋) 추억은 어디다 널어 말려야 할 것인가?

읽고 싶은 시 2014.05.19

미운 오리 새끼 / 황동규

‘우리는 깨침에 대해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은가. 봄이 오면 풀과 나무는 절로 꽃을 피우는데? 불타의 말에 예수는 못 들은 척 산사(山寺)에 오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산이 꿈틀대더니 꽃의 파도가 되었다. 다시 보니 산이었다. 눈을 거두며 예수가 말했다. ‘사람의 속모습은 거의 비슷하지. 겉으론 봄꽃 진 다음 여름꽃 피고 꽃인지 낟알인지 모를 걸 머리에 달고 가을 억새는 좋아서 물결치지만.’ ‘아예 하찮은 풀로 치부하고 살다가 어느 일순 환히 꽃 피우는 자는?’ 불타의 말을 받아 예수가 속삭였다. ‘겁나겠지!’

읽고 싶은 시 2014.05.17

상선암에서 / 도종환

차가운 하늘을 한없이 날아와 결국은 바위 위에 떨어진 씨앗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흙 한톨 없고 물 한방울 없는 곳에 생명의 실핏줄을 벋어내릴 때의 그 아득함처럼 우리도 끝없이 아득하기만 하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바위 틈새로 줄기를 올리고 가지를 뻗어 세운 나무들의 모습을 보라 벼랑끝에서도 희망은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희망은 있는 것이다 불빛은 아득하고 하늘과 땅이 뒤엉킨 채 어둠에 덮여 우리 서 있는 곳에서 불빛까지의 거리 막막하기만 하여도 어둠보다 더 고통스러이 눈을 뜨고 어둠보다 더 깊은 걸음으로 가는 동안 길은 어디에라도 있는 것이다 가장 험한 곳에 목숨을 던져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읽고 싶은 시 2014.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