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의 그집 / 박경리 옛날의 그 집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 읽고 싶은 시 2014.08.22
눈먼 말 / 박경리 눈 먼 말 글기둥 하나 잡고 내 반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고 풀 수도 없었네 영광이라고도 하고 사명이라고도 했지만 진정 내겐 그런 것 없었고 스치고 부딪히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기둥 하나 붙들고 여까지 왔네 읽고 싶은 시 2014.08.20
어떤 상승 / 신달자 어 떤 상 승 나 거기 닿았어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극치의 정상 나 거기 몸이 오르고 말았어 덮고 덮이는 하늘과 땅의 긴긴 밀월 지상의 나무들이 한꺼번에 파르르 떨던 숨막히는 비상 나 거기 닿고 말았어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극의 너머로 훨훨 날아오르는 몸 없이 몸이 오르는 끝없이 .. 읽고 싶은 시 2014.08.18
고요 속으로 / 신달자 고요 속으로 고요도 울렁증이 있어 빈속으로 멀미하듯 고요의 늪에 들면 토약질을 하게 되지 저 여자 외롭다고 말하며 헛구역질하고 있네 내장을 다 들어내었나 속이 너무 비어 어질어질 생의 밑바닥까지 다 넘기고 철철 검은 거품까지 토하고 나면 아는가 그 다음에 고요가 다시 오지 .. 읽고 싶은 시 2014.08.15
별의 길 / 정호승 별 의 길 지금까지 내가 걸어간 길은 별의 길을 따라 걸어간 길뿐이다 별의 골목길에 부는 바람에 모자를 날리고 그 모자를 주우려고 달려가다가 어둠에 걸려 몇 번 넘어졌을 뿐이다 때로는 길가에 흩어진 내 발에 맞지 않는 신발 몇 켤레 주워 신고 가다가 별의 길가에 잠시 의자가 되어 .. 읽고 싶은 시 2014.08.13
여 행 / 정호승 여 행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 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 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 읽고 싶은 시 2014.08.12
미소 / 정호승 미 소 부디 반가사유상처럼 미소 지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 위를 걸을 때나 바다에 넘어져 다시 일어나 흐느낄 때나 거친 삼각파도 위에 반가사유상처럼 고요히 앉은 자세로 평생에 단 한번 세상의 너와 나를 생각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턱을 손에 펴고 눈을 아래로 .. 읽고 싶은 시 2014.08.11
점 / 도종환 점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합니다 비안개에 잠겼던 산은 어둠속에 몸을 묻습니다 소리 없이 내리는 비에 사과꽃 가뭇없이 지는 동안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다 버리셨는지요 저도 그 할머니에게서 떡을 사 먹었습니다 이제 막 솟아나는 붓꽃 꽃대를 꺾어 현재심에 점을 찍었.. 읽고 싶은 시 2014.08.08
고요한 강 / 도종환 고 요 한 강 강은 다시 고요해져 흘러간다 합수머리에 들어설 때나 살여울을 지날 때면 장터처럼 왁자지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은 저녁이 오기 전에 평정을 찾으려고 자꾸 가슴을 쓸어내렸다 억센 바위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도 가야하고 비단뱀처럼 굽이치는 강허리를 돌아서.. 읽고 싶은 시 2014.08.06
무등산 / 이성부 무 등 산 콧대가 높지 않고 키가 크지 않아도 자존심이 강한 산이다. 기차를 타고 내려가다 보면 그냥 밋밋하게 뻗어 있는 능선이, 너무 넉넉한 팔로 광주를 그 품에 안고 있어 내 가슴을 뛰게 하지 않느냐. 기쁨에 말이 없고, 슬픔과 노여움에도 쉽게 저를 드러내지 않아, 길게 돌아누워 .. 읽고 싶은 시 2014.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