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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에 대한 후회 / 정호승

나에겐 버릴 수 있는 자존심이 너무 많은 게 탈이었다 돈과 혁명 앞에서는 가장 먼저 가장 큰 자존심을 버려야했다 버릴 수 없으면 죽이기라도 해야 내가 사는 줄 알았다 칼을 들고 내 자존심의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 자객처럼 자존심의 심장에 칼을 꽂아도 자존심은 늘 웃으면서 산불처럼 되살아났다 어떤 자존심도 도끼로 뿌리까지 내리찍어도 산에 들에 나뭇가지처럼 파랗게 싹이 돋았다 버릴 수 있는 자존심이 너무 많아서 슬펐던 나의 일생은 이미 눈물로 다 지나가고 이제 마지막 하나 남은 죽음의 자존심은 노모처럼 성실히 섬겨야한다 자존심에도 눈이 내리고 꽃이 피는지 겨울새들이 찾아와 맛있게 먹고 가는 산수유 붉은 열매가 달려 있다

읽고 싶은 시 2025.04.26

사는 일 / 나태주​

오늘도 하루 잘 살았다.굽은 길은 굽게 가고곧은 길은 곧게 가고​막판에는 나를 싣고가기로 되어 있는 차가제시간보다 일찍 떠나는 바람에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두어 시간땀 흘리며 걷기도 했다.​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아니했다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걸었으므로만나지 못했을 뻔했던 싱그러운바람도 만나고 수풀 사이빨갛게 익은 멍석딸기도 만나고해 저문 개울가 고기비늘 찍으러 온 물총새물총새, 쪽빛 날갯짓도 보았으므로.​이제 날 저물려 한다 길바닥에 떠돌던 바람은 잠잠해지고새들도 머리를 숲으로 돌렸다 오늘도 하루 나는 이렇게 잘 살았다. 출처 : 사는 일 / 나태주. 작성자 소천의 샘터

읽고 싶은 시 2025.04.25

부활절 아침의 기도 / 박목월

주여저에게이름을 주옵소서.당신의부르심을 입어저도 무엇이 되고 싶습니다.주여주여주여태어나기 전의이 혼돈과 어둠의 세계에서새로운 탄생의빛을 보게 하시고진실로 혼매한 심령에눈동자를 베풀어 주십시오.'나'라는 이 완고한 돌문을열리게 하옵시고당신의 음성이불길이 되어저를 태워 주십시오.그리하여바람과 동굴의저의 입에신앙의 신선한열매를 물리게 하옵시고당신의부르심을 입어저도 무엇이 되고 싶습니다.주여간절한새벽의 기도를 들으시고저에게 이름을 주옵소서. 출처: 부활절 아침의 기도 / 박목월. 작성자 소천의 샘터

읽고 싶은 시 2025.04.22

그대 / 정두리

​우리는 누구입니까빈 언덕에 자운영꽃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반짝이는 조약돌이름을 얻지 못한 구석진 마을의 투명한 시냇물일제히 흰 띠를 두르고 스스로 다가오는 첫눈입니다​우리는 무엇입니까늘 앞질러 사랑케 하실 힘 덜어내고몇 배로 다시 고이는 힘이파리도 되고 실팍한 줄기도 되고아! 한목에 그대를 다 품을 수 있는 씨앗으로남고 싶습니다허물없이 맨발인 넉넉한 저녁입니다뜨거운 목젖까지 알아내고도 코끝으로까지발이 저린 우리는 나무입니다​우리는 어떤 노래입니까이노리나무 정수리에 낭낭 걸린 노래 한 소절아름다운 세상을 눈물나게 하는눈물나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그대와 나는 두고두고 사랑해야 합니다​그것이 내가 네게로 이르는 길네가 깨끗한 얼굴로 내게로 되돌아오는 길그대와 나는 내리내리 사랑하는 일만남겨두어야 합니다..

읽고 싶은 시 2025.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