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143

신록예찬(新綠禮讚) / 이양하

봄, 여름, 가을, 겨울, 두루 사시(四時)를 두고 자연이 우리에게 내리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그 중에도 그 혜택을 풍성히 아낌없이 내리는 시절은 봄과 여름이요, 그 중에도 그 혜택을 가장 아름답게 나타내는 것은 봄, 봄 가운데도 만산(滿山)에 녹엽(綠葉)이 싹트는 이 때일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 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 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

왕빠갑빠 / 유병석

지난 70년대의 어느 세월에 있었던 이야기다. 명실상부한 대학의 전임교수였지만 툭하면 학교가 문을 닫는지라 나는 실업자와 같이 집에서 뒹굴며 지내기 일쑤였다. 문을 닫는 시절이 마침 가장 화창한 계절인 4,5월이거나 생기가 나는 때인 9, 10월이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아니하고 풀 수 없는 울분이 치솟아 집에서 혼자 소주잔이나 홀짝대고 허송세월한 도리 밖에 없었던 시대. 왕빠, 깝빠, 땅꼬마, 풀떼기 등의 기발한 딱지 용어를 이때 배웠다. 아내는 돈 벌러 가게에 나가고 큰놈들은 학교에 나간 고즈넉한 오전이면 푸른 바다 넓은 백사장에서 하루 종일 게와 노니는 심정으로 네 살짜리 막내와 집을 지키며 놀았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놀 때 어른이 아이가 되어야지, 아이가 어른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나는 그..

풀꽃 같은 말씀들 / 최은정

지리산을 사백 번 가보고나니 그때서야 산이 보이더라는 어느 산악인의 말이 떠오른다. 내 나이 일흔하고도 넷이다. 나는 이제야 눈이 뜨이고 귀가 트이는가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 알베로니는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주변에서 들을 수 있는 좋은 말들을 모아두는 어록 수첩을 만들었다. 많이 듣고 보고 그 가운데 좋은 것을 가려서 따르고 기억해 둔다면, 나도 풀꽃 같은 아름다운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곡성 돌실나이 삼베 기능 보유자인 김점순 할머니의 말씀으로 일꾼 옷은 넉 새, 한량 옷은 여섯 새, 원님 옷은 아홉 새 삼베를 썼다 한다. 바람 솔솔 통하는 넉 새 삼베가 으뜸이겠지만 곱기로 치면 아홉 새 삼베가 그 중 곱다고 한다. 김점순 할머니께 아홉 새 삼..

오아시스와 신기루 / 변해명

공항에 나와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서둘러 떠나는 사람과 안도의 몸짓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이별하기 힘겨워 손을 놓지 못하는 사람과 가족의 마중에 덥석 얼싸안고 피로를 지우는 사람들, 낯 선 이국에 맞아줄 사람을 기웃거리며 찾는 사람들… 맞고 보내는 사람들 속에서 나도 여행자가 되어본다. 모두는 생각의 오아시스를 찾아 떠나고, 새로운 떠남을 꿈꾸며 돌아오는 사람들이다. 나도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해 출발을 서두르는 사람처럼 공연히 마음이 들뜬다. 일상을 탈출하고 싶은 여행자들은 모처럼 휴가를 만들어 쉴 곳을 찾아 떠날 것이다. 아니면 새로운 세계에 접하고 싶고, 그 분야를 내 일상에 접목하고 싶어 도전을 안고 떠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여행자들은 이국의 풍물에 젖어보고 싶어 둥지를 잠시 벗어..

구상 시인의 모자 / 구 활

구상 시인에게는 항상 가을 냄새가 난다. 가을에 처음 뵈었기 때문이리라. 시인에게서 가을 외에는 다른 계절의 이미지는 느낄 수가 없다. 가을 남자. 그래. 뭔가 조금은 쓸쓸하고 만남 보다는 떠남이 좀 더 어울리는 그런 남자가 구상 시인이다. 시인을 처음 뵌 것은 삼십 여 년 전인 칠십 년대 초, 플라타너스의 잎들이 돌가루 포대 색깔을 하고 도로를 질주하는, 가을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었다. 시인은 옅은 갈색 코트에 걸 맞는 중절모를 쓰고 이 세상 모든 것을 너그럽게 포용하고 그리고 용서할 수 없는 자들에게도 자비를 베풀 것처럼 약간은 어눌한 말투를 앞세우고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나셨다. “활(活)이라 그랬지.” “예” “그래 사회부 기자라며.” “예” 시인은 내가 근무하던 신문사의 편집부국장이자 집안 조카..

인생이 너무나 아름답다 / 박경리

지내다 보니 기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오래 앓아온 고혈압과 당뇨병으로 눈도 나빠지고 병이 여러 가지 겹치다 보니 몸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되도록 병원에 가지 않고 견디려고 하는데, 그러다 보니 병이 더 심하게 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살 만큼 산 사람으로서 자꾸 아프다고 말하자니 한편 민망한 일이기도 합니다. 몸이 아프면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일을 못 하는 것입니다. 몸이 쇠약해지면 들지도 못하고 굽히지도 못하니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일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일은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일이 보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프다는 것, 죽는다는 것은 생명의 본질적인 작용인 일을 못 하는 것이기에 절망적입니다. 죽음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에..

구원(久遠)의 여상(女像) / 피천득

구원의 여상은 성모 마리아입니다, 단테의 , 르브르 박물관에 있는 헤나(Hdnna)의 '파비올라'입니다.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기에는 좁은 길이라고 믿는 알리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한 '불타 오르던 과거를, 쌓이고 쌓인 재가 덮어버린 지금은 당신을 다시 만나고 싶어해도 되겠지요. 언제라도 볼일이나 유람차 님므 부근에 오시거든 에그비브에도 들러 주세요.' 이런 편지를 쓴 주리엣도 구원의 여상입니다. 지나간 즐거운 회상과 아름다운 미래의 희망이 모인 얼굴. 그날그날 인생살이에 너무 찬란하거나 너무 선(善)스럽지 않은 것, 순간적인 슬픔, 단순한 계교. 칭찬, 책망, 사랑, 키스, 눈물과 미소에 알맞는 것, 워즈워드의 이런 여인도 구원의 여상입니다. 여기 나의 한 여상이 있습니다. 그의 눈은 하늘같이 맑습니..

달밤의 연못 ( 荷塘月色 ) / 주자청 ( 朱自淸 )

요 며칠은 마음이 퍽 심란하였다. 오늘 밤 정원에서 바람을 쐬다가 불현듯 날마다 거닐었던 연못이 생각났다. 휘영청 달 밝은 밤에는 뭔가 색다른 느낌이 있을 것이다. 달은 점점 높이 떠오르고 담 밖 한길가의 떠들썩한 아이들 웃음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아내는 방안에서 윤아閏兒의 등을 다독거리며 잠재우고 있다.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자장가를 응얼거리고 있다. 나는 슬그머니 겉옷을 걸치고 문밖을 나섰다. 연못을 따라 구불구불 굽어진 조그마한 길이 하나 나있다. 호젓하고 깊숙한 이 길은 낮에도 인적이 드물고 밤에는 더욱 적막함이 흐른다. 연못 사방으로 수많은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길 한쪽으로 대부분 버드나무들이고, 그 밖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달빛이 없는 밤이면 무서운..

책(冊) / 이태준

책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 ‘책’보다 ‘冊’이 더 아름답고 더 ‘冊’ 답다. 책은, 읽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어루만지는 것인가? 하면, 다 되는 것이 책이다. 책은 읽기만 하는 것이라면 그건 책에게 너무 가혹하고 원시적인 평가다. 의복이나 주택이 보온만을 위한 세기世紀는 벌써 아니다. 육체를 위해서도 이미 그렇거늘 하물며 감정의, 정신의,사상의 의복이요 주택인 책에 있어서랴! 책은 한껏 아름다워라. 그대는 인공으로 된 모든 문화물 가운데 꽃이요 천사요 또한 제왕이기 때문이다. 물질 이상인 것이 책이다. 한 표정 고운 소녀와 같이 한 그윽한 눈매를 보이는 젊은 미망인처럼 매력은 가지가지다. 신간란에서 새로 뽑을 수 있는 잉크 냄새 새로운 것은, 소녀라고 해서 어찌 다 그다지 신선하고 상..

봄 春 / 주자청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바람이 불어온다. 봄의 발걸음이 다가선 것이다. 천지만물이 막 잠에서 깨어난 듯 흔연히 눈을 뜬다. 산은 산뜻함으로 윤기가 돌기 시작하고, 강물도 세차게 흐르기 시작하고, 태양의 얼굴 또한 빨갛게 붉어지기 시작했다. 여리고 푸른 새싹들이 살며시 땅을 비집고 돋아나온다. 정원에도 들판에도 온통 갓 싹이 돋아난 풀들로 가득하다. 앉아도 보고, 누워도 보고, 딩굴어도 보고, 공을 차기도 하고, 달려도 보고, 숨바꼭질도 해본다. 바람은 가볍게 살랑거리고 풀은 솜털처럼 보드랍다.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그리고 배나무는 한 치의 양보 없이 앞 다투어 꽃을 피운다. 붉은 꽃은 불덩이 같고, 분홍 꽃은 노을 같고, 흰 꽃은 눈송이 같다. 향긋한 꽃내음을 느끼며 눈을 감으니 나뭇가지마다 벌써 복숭아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