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744

호랑지빠귀 / 도종환

기교를 버리면 새소리도 빗줄기를 수평으로 가른다 깊은 밤 무덤가 또는 잔비 내리는 새벽 숲 초입에서 우는 호랑지빠귀 사방이 단순해지고 단순해져 오온이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때 새는 노래도 버리고 울음도 버려 더욱 청아해진다 한숨에 날을 세워 길게 던지는 소리인 듯도 하고 몸의 것들을 다 버린 소리의 영혼인 것도 같은 호랑지빠귀 소리는 단순해지면 얼마나 서늘해질 수 있는지 알려준다 금관악기 소리보다 흙피리 소리가 왜 하늘과 땅의 소리를 더 잘 담아내는지 가르쳐준다 깊은 밤 어둠을 가르고 미명의 비안개를 자르고 그 속에서 둘이 아니고 하나인 정과 동을 거느리는 소리 기교를 버려 단순해진 소리가 왜 가장 맑은 소리인지 들려주는 호랑지빠귀 소리

읽고 싶은 시 2014.05.01

핸드폰 / 신달자

지갑보다 핸드폰을 더 챙겨넣는 내 핸드빽은 팽팽하다 목이 차도록 빵빵하게 충전을 시킨 내 몸도 그렇게 꽉 차게 충전을 시킨 터질 듯한 기세로 은밀히 나는 지금 외출을 한다 어느 극지에서도 너와 하나가 될 수 있지 직통 연결의 직접 관통 지구 끝에서 울리는 너의 목소리 나는 지금 테헤란로 포스코 건물 앞에서 어느 해변 도로를 달리는 너의 웃음소리를 듣지만 사실은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동행의 안도감 우리는 알고 있지 두 사람의 집중력이 높여가는 무한대의 충전 위력 우리 손에 쥐고 있는 뜨거운 약속 오늘 하루분의 우리 생명

읽고 싶은 시 2014.04.30

나무 1 / 신경림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례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 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 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이와 같을까만

읽고 싶은 시 2014.04.29

꽃이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 도종환

피었던 꽃이 어느새 지고 있습니다 화사하게 하늘을 수놓았던 꽃들이 지난 밤 비에 소리없이 떨어져 하얗게 땅을 덮었습니다 꽃그늘에 붐비던 사람들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화사한 꽃잎 옆에 몰려오던 사람들은 제각기 화사한 기억 속에 묻혀 돌아가고 아름답던 꽃잎 비에 진 뒤 강가엔 마음 없이 부는 바람만 차갑습니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살아가야 할 날들만 길고 멉니다 꽃 한 송이 사랑하려거든 그대여 생성과 소멸 존재와 부재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아름다움만 사랑하지 말고 아름다움 지고 난 뒤의 정적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올해도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읽고 싶은 시 2014.04.28

늦은 꽃 / 도종환

꽃은 더디 피고 잎은 일찍 지는 산골에서 여러 해를 살았지요 길어지는 나무들의 동안거를 지켜보며 나도 묵언한채 마당이나 쓸었지요 내 이십대와 그 이후의 나무들도 늦되는 것이 얼마나 많았던지요 늦게 피는 내게 눈길 주는 이 없고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낙화는 빨리 와 꽃잎 비에 젖어 흩어지며 서른으로 가는 가을은 하루하루가 스산한 바람이었지요 내 마음의 꽃잎들도 젖어 딩굴며 나를 견디기 힘들어했지요 이 산을 떠나는 날에도 꽃은 더디 피고 잎은 먼저 지겠지요 기다리던 세월은 더디 오고 찬란한 순간은 일찍 지평에서 사라지곤 했으니 내 남은 생의 겨울도 눈 내리고 서둘러 빙판 지겠지요 그러나 이 산에 내 그림자 없고 바람만 가득한 날에도 기억해주세요 늦게 피었어도 그 짧은 날들이 다 꽃 피는 날이 있다고 일찍 ..

읽고 싶은 시 2014.04.22

소리없는 말씀 / 신달자

아침에 일어나면 베란다 앉은 화분에 꽃 한 송이 또 피어있다 밤의 깊은 침묵이 호올로 이끌어낸 붉은 전언傳言 한마디 톡 내 이마를 때리니 꽃피는 공간에 나 서 있는 것 보인다 노래 한번 불러주지 못했는데 간밤 웅성거림 하나 없이 따뜻한 예감으로 내 가슴속에 활짝 피어올라 기우뚱하는 나를 바로 세우는 저 몸짓 연약한 그러나 당찬 말씀의 홀몸 길들이기 아침부터 나는 학습 중이다

읽고 싶은 시 2014.04.21

작아지는 발 / 신달자

새봄 새순같이 부드러워 혼자 걸 수 없었던 내 발은 처음으로 혼자 섰을 때의 환호하는 어머니의 기억을 갖고 있다 시골 흙길과 들길을 발 부르트게 다닌 개구쟁이의 기억은 내가 알고 있는 일 서서히 내 발은 자라 고무신에서 하이힐을 신으며 세상을 밟고 살아오면서 고무에서 가죽으로 내 마음도 단단해졌다 오징어 배보다 더 큰 배를 신고 싶었다 비행기같이 하늘을 나는 높은 구두를 신고 어머니를 누르던 키 큰 사람들을 놀려주고 싶었다 날쌘 파도와 바람을 가르며 장부丈夫 같은 바람을 가르며 돛으로 깃발로 휘날리고 싶었다 그러나 꿈은 높고 발은 작아 온몸에 버거운 퇴적물만 쌓여 군더더기의 살들이 무거웠을까 자꾸만 한 문수씩 줄어드는 내 발 내 몸의 은근한 양심수인가 헛된 것의 하중을 내 발이여! 내가 스스로 알고 있것다!

읽고 싶은 시 2014.04.20

냉이꽃 한 송이도 제 속에서 거듭납니다 / 도종환

냉이꽃 한 송이도 제 속에서 거듭납니다 제 속에서 거듭난 것들이 모여 논둑 밭둑 비로소 따뜻하게 합니다 참나무 어린 잎 하나도 제 속에서 거듭납니다 제 속에서 저를 이기고 거듭난 것들이 모여 차령산맥 밑에서 끝까지 봄이게 합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 속에서 거듭납니다 저 자신을 죽이고 다시 태어난 사람들 모여 이 세상을 아직 희망이게 합니다.

읽고 싶은 시 2014.04.19

혼魂을 쫓다 / 황동규

몇 봄째 홀가분한 매화 여행 꿈꾸었으나 매화 때면 늘 일터를 맴돌게 돼 이제는 꿈의 봄도 몇 남지 않았네. 토요일 오후 연구실 창밑이 환해 내려다보니 정원 청매靑梅 꽃 막 지고 있어 아 새봄이 막 가고 있어 내려가 천천히 걸으며 몸으로 꽃잎을 받았네. 요리저리 피해 땅에 떨어지는 놈이 더 많아 하나라도 더 받으려 몸을 자꾸 기우뚱거렸네. 이러다 내가 죽은 후 혼이 연구실 주변이나 맴돌지 않을까. 동료들 다 나가고 횅한 봄날 토요일 오후에? 두 손 설레설레 흔들어 혼을 쫓는 시늉을 했네.

읽고 싶은 시 2014.04.16

은은함에 대하여 / 도종환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아련한 향기가 스미어 있다 은은하다는 말 속에는 살구꽃 위에 내린 맑고 환한 빛이 들어 있다 강물도 저녁햇살을 안고 천천히 내려갈 땐 은은하게 몸을 움직인다 달빛도 벌레를 재워주는 나뭇잎 위를 건너갈 땐 은은한 걸음으로 간다 은은한 것들 아래서는 짐승도 순한 얼굴로 돌아온다 봄에 피는 꽃 중에는 은은한 꽃들이 많다 은은함이 강물이 되어 흘러가는 꽃길을 따라 우리의 남은 생도 그런 빛깔로 흘러갈 수 있다면 사랑하는 이의 손잡고 은은하게 물들어갈 수 있다면

읽고 싶은 시 2014.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