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703

수선화 / 박정순

눈부시지 않은 모습으로 뜰 앞 정원의 모퉁이에서 봄을 안내하는 등을 켠 아프로디테 가녀린 몸매로 긴 겨울 어이 참아내었는지 무명의 어둠 끌어안고 삭이고 삭인 고통의 흔적 그 얼굴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구시렁거리지도 않은 또 다른 별의 모습으로 꽃등을 켰다 항시 화려함이 아름다움은 아니듯 은은히 존재를 밝히는 가녀린 모습 앞에 마음도 한 자락의 옷을 벗고 노오란 향기와 모습 앞에 얼룩진 내 삶을 헹군다

읽고 싶은 시 2024.04.25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읽고 싶은 시 2024.04.16

결혼 축시 - 아가서를 대하며 / 이수창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하나님의 말씀 그대들의 삶 가운데 늘 가득하여라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아름다운 열매 그대들의 삶 가운데 늘 가득하여라 어여쁘고 어여쁜 그대들은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신부여 그대는 여자들 중에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고 신랑이여 그대는 남자들 중에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아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은 그대들이여 많은 물도 꺼치지 못하고 홍수라도 엄몰치 못할 영원한 행복 그대들의 삶 가운데 늘 피어올라라

읽고 싶은 시 2024.04.16

행 복 / 헤르만 헤세

​ 당신이 행복을 찾아 떠나신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 될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이랍니다 세상에 모든 사랑스러운 것이 당신의 것이 될지라도 ​ 당신이 만일 잊어버린 것에 아쉬워하고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초조해한다면 아직도 당신은 ​ 마음의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랍니다 당신이 모든 희망을 버리고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그 어떤 목적과 소망마저 원하지 않게 될 때 ​ 그때 비로소 세상의 모든 어둠은 당신에게서 멀어져 갈 것이며 당신의 영혼은 진정으로 평화로울 것입니다

읽고 싶은 시 2024.02.27

새 해 / 구 상

내가 새로와 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내가 새로와져서 인사를 하면 이웃도 새로와진 얼굴을 하고 지난날의 쓰라림과 괴로움은 오늘의 쓰라림과 괴로움이 아니요 내일도 기쁨과 슬픔이 수놓겠지만 그것은 율조(律調)일 따름이다 흰 눈같이 맑아진 내 의식(意識)은 이성(理性)의 햇발을 받아 번쩍이고 내 심호흡(深呼吸)한 가슴엔 사랑이 뜨거운 새 피로 용솟음 친다 꿈은 나의 충직(忠直)과 일치(一致)하여 나의 줄기찬 노동은 고독을 쫓고 하늘을 우러러 소박한 믿음을 가져 기도(祈禱)는 나의 일과(日課)의 처음과 끝이다 이제 새로운 내가 서슴없이 맞는 새해 나의 생애(生涯), 최고의 성실로써 꽃피울 새해여 !

읽고 싶은 시 2024.02.12

두 그루 은행나무 / 홍윤숙

두 그루 은행나무가 그 집 앞에 서 있습니다 때가오니 한 그루는 순순히 물들어 황홀하게 지는 날 기다리는데 또 한 그루는 물들 기색도 없이 퍼렇게 서슬 진 미련 고집하고 있습니다 점잖게 물들어 순하게 지는 나무는 마음 조신함에 그윽해 보이고 퍼렇게 잘려 아니다 아니다 떼를 쓰는 나무는 그 미련하게 옹이 진 마음 알 수는 있지만 왠지 일찍 물든 나무는 일찍 물리를 깨달은 현자처럼 그윽해 보이는데 혼자 물들지 못하고 찬바람에 떨고 섰는 나무는 철이 덜든 아이처럼 딱해 보입니다 아마도 그 집 주인을 닮았나 봅니다 날마다 두 그루의 나무가 마주 서서 서로 다른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그 집 앞 가을이 올해도 깊어 갑니다

읽고 싶은 시 2024.01.28

그리스도 폴의 강 36 / 구 상

​ ​ 내가 이 강에다 종이배 처럼 띄워보내는 이 그리움과 염원은 그 어디서고 만날 것이다 그 어느 때이고 이뤄질 것이다 ​ 저 망망한 바다 한복판일는지 저 허허한 하늘 속일는지 다시 이 지구로 돌아와 설는지 그 신령한 조화 속이사 알 바 없으나 ​ 생명의 영원한 동산 속의 불변하는 한 모습이 되어 ​ 내가 이 강에다 종이배처럼 띄워보내는 이 그리움과 염원은 그 어디서고 만날 것이다 그 어느 때고 이뤄질 것이다 ​

읽고 싶은 시 2024.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