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의 왕버들 / 윤소천

입춘 지난 어느 날, 온종일 함박눈이 내리는데 나는 무등산(無等山) 자락 충효마을 앞을 지나고 있었다. 다른 나무들은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는데 왕버들은 어느새 연둣빛 움을 틔우며 봄을 알리고 있었다. 여기에 춘설이 내려 왕버들 가지에 흠뻑 쌓였는데 이 모습이 장엄(莊嚴)하고 신령스러워 그 앞을 그저 지나기가 쉽지 않게 마음에 큰 울림이 있었다. 무등산 정기를 받고 자란 김덕령 장군은 어릴 적부터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 잡은 장사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군은 문무를 갖춘 젊은 의병장으로 호남과 영남 곳곳에서 왜군을 격파해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그런데 장군의 전공을 시기한 무리들이 이몽학의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하여 신하들의 간곡한 상소에도 불구하고 29세의 젊은 나이에 순절한다. 충무공(忠武..

소천의 수필 2023.05.20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무등산(無等山) / 윤소천

빛고을 광주(光州)를 안고 있는 무등산은 인근의 담양 나주 화순 장성, 동서남북 어디에서 보아도 자애롭고 든든한 모습이다. 무등(無等)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 세상만물이 평등하다는 하늘의 섭리를 보여준다. 부드러운 무등의 능선은 푸른 하늘에 욕심 없이 그어놓은 한 가닥 선(線)이다. 나는 무등산 아래 빛고을 유동(柳洞), 버들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의 품에서 포근했던 유년시절, 방문을 열고 마루에 서면 탱자 울 너머로 무등산이 보였다. 무등산에 눈이 세 번 오면 시내에 첫눈이 온다는 어머니의 말에 무등산에 하얀 눈이 내린 아침이면, 누나는 일찍 일어나 ‘눈 왔다. 무등산에 눈 왔어.’하고 우리를 깨우고, 우리 형제들은 우르르 마루로 나와 무등산을 바라보았다. 학창시절 방학이 되어 서울에서 고향으로 ..

소천의 수필 2022.07.31

세상에서 가장 멋진 춤 / 윤소천

내가 살고 있는 담양 창평은 광주에서 차로 십 여분 거리의 근교에 있는 쌀엿과 한과로 유명한 고을이다. 옛날 양녕대군의 귀양살이 때 같이 내려온 궁녀들의 솜씨를 이어 받아 쌀엿 조청 그리고 유과 약과 정과 강정 등이 지역의 특산품이다. 산지에 대나무숲이 많아 생태마을로 불리기도 하는데 우리 옛 음식 문화와 한옥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되었다. 슬로시티 운동은 공해 없는 자연 속에서 전통문화와 자연을 보호하고 '느림의 삶'을 추구하는 국제운동으로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세계적으로 마을을 등에 지고 걷는 달팽이의 모습이 슬로시티의 마스코트이다. 얼마 전 한 신부님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춤은 무슨 춤이라 생각 하느냐.’하는 질문을 했다. 나는 순간 백조의 호수 발레를 생각하다 하얀..

소천의 수필 2021.10.05

주무숙(周茂叔)의 정원 / 윤소천

담양 창평 우리 동네에 이삼년 전부터 연방죽이 생겼다. 산 아래 천 여 평의 논에 물을 대어 만든 백련못인데, 백학이 내려앉은 듯 무리 져 핀 하얀 연꽃 속에 무릉도원에서 날아온 복사꽃 같은 붉은 연이 예 일곱 송이 듬성듬성 피어있다. 연못가에는 작은 황토집이 있고 의자가 놓여있는데 들릴 때마다 집주인은 못 만났다. 주인이 백련을 좋아하는 것 같아 나는 이곳을 주무숙의 정원이라 부른다. 의자에 앉아 연꽃을 마주하고 있으니 내가 중국 북송(北宋)시대 주무숙(周茂叔)이 된 듯 애련설(愛蓮說)이 입에서 흘러 나왔다. “연꽃은 진흙에서 나오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물에 깨끗이 씻겨도 요염하지 않으며, 줄기 속은 비어있으나 겉은 곧아서 덩굴이나 가지를 뻗지 않고, 향기는 멀리까지 맑으며, 우뚝하고 조촐히..

소천의 수필 2021.08.13

무화과(無花果)

눈이 유난히 많이 내린 오후, 시내 중심가에 있는 음악 감상실 베에토벤에 들렀다가 평소 한번 뵙고 싶었던 스님을 만나 차를 마시게 되었다. 이 자리가 길어져 눈으로 차편이 끊긴 십리 벚나무길로 유명한 스님 거처를 내차로 가게 되었다. 이 인연으로 다시 산사를 찾았는데, 차를 마시면서 스님은 엽서 크기 만 한 화선지에 주묵(朱墨)으로 선어(禪語) 몇 장을 써 주었다. 이 무렵 나는 갈대와 억새가 흐드러진 드넓은 영산강 변을 자주 찾곤 하였는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묵묵히 흐르고 있는 겨울강에서 일찌기 느껴보지 못한 무심 속에 평안을 느껴서였다. 이날도 강변에 차를 대고 갈대밭 너머로 지고있는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있는데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를 얻고,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얻는다.’는 스님이 써준 ..

소천의 수필 2021.08.13

닭 울음소리 / 윤소천

도시 근교 시골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 들리는 소리가 닭 울음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 그리고 아침저녁 풀벌레소리다. 처음에는 소란스레 들렸지만 세월이 흘러 자리가 잡히자 이제는 정겨운 일상의 소리가 되었다. 먼동이 트면 멀리 가까이에서 수탉들은 날개를 퍼덕여 힘차게 홰를 치며 청아한 목소리로 꼬~끼오꼬 하고 천지를 깨운다. 우리 선조들은 새벽닭 울음소리를 들으면 산에서 내려왔던 맹수가 돌아가고 잡귀가 모습을 감춘다고 믿어 제사를 지낼 때 닭 우는소리를 기준으로 하였다. 주역에서 닭은 팔괘의 손(巽)에 해당하는데 방위가 여명이 시작되는 남동쪽이어서 상서로운 동물이라 한다. 고대 그리스는 수탉을 악마를 물리치는 수호신으로, 프랑스에서는 프랑스대혁명 후 정의 용기 평등을 상징하는 국조(國鳥)로삼았다. 프랑스 화폐..

소천의 수필 2020.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