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의 수필 30

봄이 오는 길목에서 / 윤소천

며칠 전 남쪽 바닷가에 사는 친지로부터 매화가 피었다는 봄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이곳은 춘설春雪이 밤새 내렸다. 뜰에 나가 보니 잔설이 쌓여있는 산수유 매화의 꽃눈이 또렷해져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사유思惟에 눈뜨던 시졀, 무서리에 자지러진 가을을 지나 눈 내린 혹한의 겨울 그리고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는 유년의 기억마저 잊게 했다. 그러나 그 고뇌와 아픔의 시간 들이 이제는 잃어버린 나를 찾는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작은 구름이 가볍게 하늘을 흘러간다 /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고 꽃은 풀숲에서 웃는다 /어디를 보아도 고단한 눈은 이제 /책에서 읽은 것을 잊으려 한다 / 내가 읽었던 어려운 것들은 / 모두 먼지처럼 날아가 버렸으며 / 겨울날의 환상에 불과했다 / 나의 눈은 깨끗하게 정화되어 / 새..

소천의 수필 2024.11.23

가슴만 남은 솟대 - 책 머리에 / 윤소천

​사랑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우리는 이 사랑의 힘으로 모든 어려움과 죽음까지도 이겨낼 수있다. 지나온 길 돌아보면, 꿈결처럼 아득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 오고는 한다.서리맞아 희끗한 머리카락, 어느새 반생을 훌쩍 넘어 종심從心에 서 있다. 사유思惟에 눈뜨던 시절. 무지와 오욕의 늪을 헤매던 여름 골짜기, 어두운 밤길 별빛만바라보고 숨이 턱에 차 걷던 고갯길들. 늦가을 무서리에 자지러진 산마루는 바람마저드세었다. 그리고 한겨울 눈 내리고 내려, 잠속에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는 유년의 기억마저 잊게 했다. 먼 길 돌아와, 이제 봄이 오는 길목의 바람 잔 들길. 자연에 몸을 맡기고 침묵의 겨울을 지나면, 나도 모르게 개안開眼한 내가 봄의 길목에 서 있다. 내 책상 위에는 소박한 빵과 스..

소천의 수필 2024.11.23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무등산(無等山) / 윤소천

빛고을 광주光州를 안고 있는 무등산은 인근 사방 어디에서 보아도 자애롭고 든든한 모습이다.무등無等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 세상만물이 평등하다는 하늘의 섭리를 보여주고 있다. 부드러운무등의 능선은 푸른 하늘에 욕심 없이 그어놓은 한 가닥 선線이다. 나는 무등산 아래 빛고을 유동柳洞, 버들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의 품에서 포근했던 유년시절, 방문을 열고 마루에 서면 탱자 울 너머로 무등산이 보였다. 무등산에 눈이 세 번 오면 시내에 첫눈이 온다는 말에무등산에 하얀 눈이 내린 아침이면, 누나는 일찍 일어나 ‘눈 왔다. 무등산에 눈 왔어.’하고 우리를 깨우고, 우리 형제들은 우르르 마루로 나와 무등산을 바라보았다. 학창시절 방학이 되어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면, 무등산은 저 멀리서 먼저 어서 오라는 ..

소천의 수필 2024.11.02

겨울 이야기 / 윤소천

​ 겨울의 뜰은 황량하고 을씨년스럽다. 추위를 견디며 나와 함께 겨울을 나는 나무들,지난 늦가을 한 잎 두 잎 잎을 떨쳐내더니 이제는 차가운 하늘 아래 알몸으로 매서운 북풍과눈보라를 맞으며 추위를 이겨내고 있다. 이를 보고 있으면 다가올 새봄을 기다리는 나무의 인내와 견고함이 느껴진다.​나무 가까이 다가가 보면 겨울잠을 자는 나무들이 어느새 새봄을 준비하고 있다.단풍은 벌써 떨켜에 틔울 싹을 마련하고 있고, 매화는 어느새 꽃눈을 틔우고 있다. 그리고 붓끝 같은 목련의 봉오리는 하늘을 향해있다. 단풍의 연두색 여린 잎, 매화의 은은한 향기, 목련꽃의 우아한 모습들을 그려보면새봄이 기다진다.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는 큰애가 며칠 전 제주 올레길 트레킹을 하고 돌아왔다.학창시절 가족여행을 다녀온 후로 여..

소천의 수필 2024.10.24

수선화 水仙花 / 윤소천

봄나들이 길에 순창 김인후 선생의 훈몽재訓蒙齋를 찾았다가 옆 농원에서 귀한 수선화 몇 분을 얻어왔다. 금잔옥대金盞玉臺라 하는 거문도巨文島수선화로 내가 좋아하는수선화다.  뜰 군데군데에 심었는데 어느새 무리를 지어 피어있다. 금잔옥대는 여섯 개의 하얀꽃잎 안에 황금빛 꽃송이가 꽃 잔처럼 오똑 서 있고 향기가 있는 기품있는 수선화다. 하얀 꽃받침에 작은 금빛 꽃송이가 종 모양 같아 바람이 불면 종소리가 날 것 같다.​수선화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도 꽃가루받이를 하지 못해 씨를 맺지 못한다.꽃이 지고 봄이 지나면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리고, 한해 내내 땅속에서 동면하며 뿌리를 키워 번식한다. 그리고 이듬해 수선화는 눈 속에서 꽃을 피워 봄을 알린다. 수선화를 상징하는 꽃말은 자존심과 자기애 그리고 외로움과 고결..

소천의 수필 2024.10.04

인생 수업료 / 윤소천

사십대 초반, 나는 사업을 하다 나라의 금융위기와 맞물려 실패를 보았다. 실업자가 되어 마음 둘 곳이 없어 기원을 찾았다. 이곳에서 대학시절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심한 고초를 겪고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택시 운전사가 된 후배를 만났다. 동변상련同病相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가 사정이 있는 날이면 내가 대신 땜빵 운전을 해주었다. 처음에는 아는 이를 만날까 두려워 모자를 깊이 눌러썼는데, 몇 번 하다 보니 익숙해지면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었다. 하루 이십 여명의 승객이 타고 내리는데,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사람 사는 저마다 모습이 보였다.그러자 일에 흥미가 생기면서 신기하게도 불면으로 깊어진 우울증이 말끔히 나았다. 이후 세상 보는 눈이 달라졌는데, 길의 노숙인과 길가 노점에서 푸성귀를 파는 할머니의 모습들..

소천의 수필 2024.09.18

차를 마시며 / 윤소천

1990년 초였다. 일을 보러 서울에 갔다가 친구와 홍익대 앞 전통 찻집에 들렀는데, 찻집 분위기가 고풍스럽고 편안했다. 처음으로 다기에 우려내어차를 마셨는데 깊고 은은한 향이 입안에 오래 남아 있어 참 좋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국의 귀한 일급 청차淸茶였다. 나는 급한 성정에 친구가 추천해준 다기와 차 두 봉지를 사 들고 내려왔다. 그 후 십여 년이 지나서야 차 맛을 알게 된 듯하다. 차 문화가 시작된 중국에서는 예부터 차는정행검덕精行儉德한 사람에게 좋다 했다. 차를 마시는 사람은 평정심平靜心이 있어 검소하며 소박한 삶을 산다는 말이다. 이들을 매사에 처신이 반듯하고여유가 있어 겸손하고 덕망있는 현자賢者라 했다. 옛글에서 차의 첫 잔은 우매愚昧한 마음을 씻어 상쾌한 마음을 갖게 하고, 둘째 잔은 마음..

소천의 수필 2024.09.16

적도를 돌고 온 술 / 윤소천

​ 가을이 깊어간다. 벼는 한여름이글거리는 땡볕에 폭우와 태풍을 이겨내고 따가운 가을 햇살에 익어 열매를 맺는다. 황금들녘에 고개 숙인 벼들을 보고 있으면 세상을 달관한 성인의 겸양을 보는듯하다. 사람은 육십이 넘으면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처럼 익어간다고 한다. 우리 삶도 꽃이 피고 지면서 열매를 맺고 시련 속에 익어가면서새롭게 태어난다. 나는 얼마 전 적도를 두 번 돌고 오는 여정에서 만들어지는 술이 있다는 말을 듣고 한 번 맛보고 싶었다. 바이킹의 후예가 만든 노르웨이의 리니아아쿠아비트LinieAquavit라는 술인데, 오크통에 담겨 적도Linie를 돌아오는 항해를 통해 숙성된다. 술병에는 노르웨이의 지도와배가 그려져 있고 그때그때의 항로가 표시되어 있는데, 바다의 기상 상태에 따라 술맛이 ..

소천의 수필 2024.02.26

진달래 고개 / 윤소천

나의 어린 시절에는 봄이면 참꽃이라 불리는 진달래가 산과 들에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그런데 요즈음은 산골에서도 보기 힘든 귀한 꽃이 되었다. 오늘은 이 진달래꽃을 보러 남쪽 강진 주작산을 찾아간다. 주작산朱雀山은 봉황이 날개를활짝 펴고 날아오르는 듯해 지어진 이름이다. 주작산과 이어져있는 덕룡산德龍山은 웅장하면서 봉우리가 창끝처럼 높이 솟아있는데 동봉과 서봉 사이에는 초원 능선이넓게 펼쳐져 있다. 이곳의 4월은 진달래꽃으로 장관을 이룬다.​앞서 간 차를 따라 산길을 오르는데, 어느새 고갯마루에 다다랐다. 바위 봉우리 사이사이에 피어 산 능선을 덮고 있는 진달래꽃이, 황홀한 선경을 이루어 신세계를 펼쳐 놓았다. 고개에 올라 진달래꽃에 취해있는데 학창시절 좋아 부르곤 했던 ‘바위고개’가 생각난다.​ '바위고..

소천의 수필 2023.11.23

말 알아듣는 고양이 / 윤소천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 처음엔 세 마리가 어미 곁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며칠 후 주먹만 한 앙증맞고 귀여운 놈들이 더 눈에 띄었다.잘못 보았나 싶어 유심히 살펴보니 같이 있던다른 녀석이 어느새 또 새끼를 낳은 것이다.​마당에 그대로 놓아두고 먹이를 주는 형편이라 녀석들식사 때나 얼굴을 모두 볼 수 있다. 녀석들은 눈에띄지 않는 곳에 새끼를 낳아 숨겨 놓았다가, 젖을 뗄무렵이면 자랑이라도 하듯 데리고 나온다. 그렇지 않아도 열 마리나 되는 녀석들 뒤치다꺼리가 쉽지 않은데, 이제 한꺼번에 일곱 마리가늘어나 고양이 대가족이 되었다. 처음 한 마리를 데려온 지가 사 년 전쯤이었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산 아랫마을 고모님 댁이었다. 누가 고양이 한 쌍을 차에 실어와 뒷산에내려놓고 가버렸는데 며칠을 굶고 울어대..

소천의 수필 2023.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