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 13

적멸에게 / 정호승

새벽별들이 스러진다 돌아보지 말고 가라 별들은 스러질 때 머뭇거리지 않는다 돌아보지 말고 가라 이제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이제 다시 보고 싶은 별빛도 없다 아지랑이는 봄 하늘 속으로 노고지리 한 마리 한 순간 사라지듯 삼각파도 끝에 앉은 갈매기 한 마리 수평선 너머로 한 순간 사라지듯 내 가난의 적멸이여 적멸의 별빛이여 영원히 사라졌다가 돌아오라 돌아왔다가 영원히 사라져라

읽고 싶은 시 2025.03.31

삼등은 괜찮지만 삼류는 안 된다 / 정호승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일등은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다. 누구나 다 일등이 될 수는 없으므로 삼등이나 그이하가 되어도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삼류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왜 그럴까. 도대체 일등과 일류,삼등과 삼류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 또 등(等)과 류(流)에는 어떤 의미 차이가 있는 것일까.‘등’은 순위나 등급 또는 경쟁을 나타내고,‘류’는 위치나 부류의 질적 가치를 나타낸다.‘등'에서 외양적 의미가 파악된다면,‘류’에서는 내면적 의미가 파악된다. 그리고‘등 보다 ‘류’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는 긍정성이 있을 것 같다. 모든 사람이 다 일등은 될 수 없지만, 모든 사람이 다 일류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재로 모든 사람이 다 일류가 될 수는 없다.‘삼류는 안 된다’고 한 것은 꼭 일..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가지 말고 품에 안고 가라 / 정호승

이 세상에 십자가를 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크고 작은 자기만의 십자가를 하나씩은 지고 살아갑니다. “저 녀석은 내가 죽을 때까지 지고 가야할 십자가야.” 이렇게 말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부모에게는 자식이 십자가입니다. “저이는 내 십자가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어.” 이렇게 말하는 아내에게는 남편이 십자가입니다. 아니면 그 반대의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라고 하면 사랑보다 고통을 먼저 떠올립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나 죽을 때까지 감당할 수밖에 없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대로 버리고 싶으나 결코 버릴 수 없는 고통의 덩어리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아마 자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청년 예수의 고통을 떠올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

삶에 대한 감사 / 박노해

하늘은 나에게 영웅의 면모를 주지 않으셨다그만한 키와 그만한 외모처럼 그만한 겸손을 지니고 살으라고 ​하늘은 나에게 고귀한 집안을 주지 않으셨다힘없고 가난한 자의 존엄으로 세계의 약자들을 빛내며 살아가라고 ​하늘은 나에게 신통력을 주지 않으셨다상처 받고 쓰러지고 깨어지면서 스스로 깨쳐가며 길이 되라고 ​하늘은 나에게 위대한 스승도 주지 않으셨다노동하는 민초들 속에서 지혜를 구하고 최후까지 정진하는 배움의 사람이 되라고 ​하늘은 나에게 희생과 노력으로 이루어낸 내 작은 성취마저 허물어 버리셨다낡은 것을 버리고 나날이 새로와지라고 ​하늘은 나에게 사람들이 탐낼만한 그 어떤 것도 주지 않으셨지만그 모든 씨앗이 담긴 삶을 다 주셨으니 무력한 사랑 하나 내게 주신 내 삶에 대한 감사를 바칩니다

읽고 싶은 시 2025.03.27

때때로 인생은 / 헤르만 헤세

때때로 강렬한 빛을 피우며인생은 즐겁게 반짝거린다.그리고 웃으며 묻지도 않는다.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멸망하는 사람들을. 그러나 나의 마음은언제나 그들과 함께 있다.괴로움을 숨기고, 울기 위하여그리움이 저녁에 방으로 숨어드는 괴로움에 얽혀 갈피를 못 잡는많은 사람들을 나는 안다.그들의 영혼을 형제라고 부르고반가이 나를 맞아 들인다. 젖은 손 위에 엎드려밤마다 우는 사람들을 나는 안다.그들은 캄캄한 벽이 보일뿐빛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암흑과 근심으로 하여훈훈한 사랑의 빛을남 몰래 지니고 있는 것을그들은 모르고 헤매이고 있다.

읽고 싶은 시 2025.03.27

백자 파편 / 최은정

채소밭을 일구다가 백자 파편이 눈에 띄어 한두 개씩 모은것이 큰 바구니에 가득 찼다. 산성 밑의 이곳이 옛날 집터 자리인지 기와 조각도 잡힌다. 대숲이나 풀숲, 논둑, 물 흐른 도랑에도 파편은 엎드려 있다. 전에도 절터에서 가끔 백자 파편을 보아왔지만 그냥 지나쳤는데 요사이는 그 파편들의 빛깔에 이끌리어 모으기 시작했다.은은한 빛깔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굽마다 형태가 달라서 술병인지 접시인지 혹은 막그릇인지를 짐작케 한다. 파편 한 조각에서도 연꽃처럼 달처럼 그 맛이 다르게 느껴진다. 혹은 쑥떡같고, 바보 같고, 멍텅구리 같게도 느껴진다. 그런데 그 맛이 날이갈수록 담담하면서 은은히 다가와 마치 천 년 전의 옛사람을 보는 듯 순수한 정감에 빠져든다.   백자의 매력은 소박하다는데 있다. 평범..

춘분 연가 / 이해인

밤의 길이 낮의 길이똑같은 오늘​흰 구름 닮은 기쁨이뽀얗게 피어오르네​봄 꽃들은 조심스레 웃고봄을 반기는 어린 새들은가만히 목소리를 가다듬고​그대를 향한 나의 사랑도밤낮이 똑같은 축복이 되기를​이웃 향한 나의 우정도일을 향한 나의 열정도밤낮이 똑같을 수 있기를​나의 인품도 조금씩더 둥글어져서​일 년 내내일생 내내똑같을 수 있기를기도해 보는 오늘!​바람이 차갑게 불어와도마음엔 따스함이 스며드는춘분의 축복이여 [출처] 춘분 연가 -이해인 / 작성자 소천의 샘터

카테고리 없음 2025.03.20

졸업 / 미츠야마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지짙은 라일락 향기를 뒤로하고우리는 서로에게작별의 말을 건넸다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자참으로 무거운 말인데도그때는 가볍게 흘려버렸다설렘을 품은 가슴으로낯선 도시의 로망을 좇아앞만 바라보고 달려왔다그때, 꽃동산처럼 보이던삶의 평원을봄날의 향기를 추억하며걸어가고 있다모퉁이를 돌아서면 집이다가로등 불빛에길게 늘어진 그림자가오늘 밤도함께 걸어주고 있다삶의 훈장이라는 것은 없다묵직한 발걸음 소리가시간의 대답처럼메아리치고 있다출처 : 문화앤피플(https://www.cnpnews.co.kr)

읽고 싶은 시 2025.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