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709

적멸에게 / 정호승

새벽별들이 스러진다 돌아보지 말고 가라 별들은 스러질 때 머뭇거리지 않는다 돌아보지 말고 가라 이제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이제 다시 보고 싶은 별빛도 없다 아지랑이는 봄 하늘 속으로 노고지리 한 마리 한 순간 사라지듯 삼각파도 끝에 앉은 갈매기 한 마리 수평선 너머로 한 순간 사라지듯 내 가난의 적멸이여 적멸의 별빛이여 영원히 사라졌다가 돌아오라 돌아왔다가 영원히 사라져라

읽고 싶은 시 2014.01.27

자작나무 / 도종환

자작나무처럼 나도 추운 데서 자랐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맑지만 창백한 모습이었다 자작나무처럼 나도 꽃은 제대로 피우지 못하면서 꿈의 키만 높게 키웠다 내가 자라던 곳에는 어려서부터 바람이 차게 불고 나이 들어서도 눈보라 심했다 그러나 눈보라 북서풍 아니었다면 곧고 맑은 나무로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몸짓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외롭고 깊은 곳에 살면서도 혼자 있을 때보다 숲이 되어 있을 때 더 아름다운 나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읽고 싶은 시 2014.01.26

불 빛 / 정호승

때때로 과거에 환하게 불이 켜질 때가 있다 처음엔 어두운 터널 끝에서 차차 밝아오다가 터널을 통과하는 순간 갑자기 확 밝아오는 불빛처럼 과거에 환하게 불이 켜질 때가 있다 특히 어두운 과거의 불행이 환하게 불이 켜져 온 언덕을 뒤덮는 복숭아꽃처럼 불행이 눈부실 때가 있다 봄밤의 거리에 내걸린 초파일 연등처럼 내 과거의 불행에 붉은 등불에 걸릴 때 그 등불에 눈물의 달빛이 반짝일 때 나는 밤의 길을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숙인다 멀리 수평선을 오가는 배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기 위해 등대가 환히 불을 밝히는 것처럼 오늘 내 과거의 불행의 등불이 빛난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살아갈수록 후회해야 할 일보다 감사해야 할 일이 더 많아 언젠가 만났던 과거불(過去佛)의 미소인가 불행의 등불을 들고 길을 걸으..

읽고 싶은 시 2014.01.25

나무 / 도종환

퍼붓는 빗발을 끝까지 다 맞고 난 나무들은 아름답다 밤새 제 눈물로 제 몸을 씻고 해 뜨는 쪽으로 조용히 고개를 드는 사람처럼 슬픔 속에 고요하다 바람과 눈보라를 안고 서 있는 나무들은 아름답다 고통으로 제 살에 다가오는 것들을 아름답게 바꿀 줄 아는 지혜를 지녔다 잔가지만큼 넓게 넓게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아름답다 허욕과 먼지 많은 세상을 간결히 지키고 서 있어 더욱 빛난다 무성한 이파리와 어여쁜 꽃을 가졌던 겨울나무는 아름답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도 결코 가난하지 않는 자세를 그는 안다 그런 나무들이 모여 이룬 숲은 아름답다 오랜 세월 인간들이 그런 세상을 만들지 못해 더욱 이름답다

읽고 싶은 시 2014.01.23

선정(禪定) / 구상

늙은 바위 번들번들한 뒷머리에 푸른 벌레가 알을 슬 듯 파릇파릇 이끼가 돋아 있다. 백곡(百縠)이 움트는 봄비의 소치(所致)런가? 아니면 백세 바위의 소생(蘇生)하는 유치(幼稚)런가 ? 이제 꽃도 열매도 잎사귀도 소용치 않고 비바람도 천둥 번개도 들리지 않고 밤도 낮도 분간이 없고 악취나 향내도 모르고 과거와 현실과 꿈이 다를 바 없는 경계(境界) 바위 안은 암거(暗渠)의 흐름이 아니라 아침 햇발을 받은 영창(映窓)의 청명(凊明) 하늘의 저 허허창창(虛虛蒼蒼)과도 면오(面晤)하고 이 지상 , 버라이어티의 문란(紊亂)도 관용(寬容)하고 저 대양(大洋)의 넘실거림도 홀로의 묵좌(黙坐)로서 진정(鎭靜)한다. 그러나 나는 알라딘의 램프가 아니다. 무심(無心)한 바위에 세심(細心)히 낀 이끼 선정(禪定)의 광경이..

읽고 싶은 시 2013.12.21

갈대 / 정호승

내가 아직 강변에 사는 것은 죽은 새들이 내 발밑에서 물결치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도 아무도 살지 않는 강변에 사는 것은 실패도 생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것이라는 죽은 새들의 정다운 웃음소리를 들으며 온종일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나의 삶이 진정 괴로운 것은 분노를 삭일 수 없다는 일이었나니 내가 아직도 바람 부는 강변에 사는 것은 죽은 새들이 날아간 하늘에 햇살이 빛나기 때문이다

읽고 싶은 시 2013.12.16

학의천 / 이현실

소소히 이는 바람에 등 떠밀려 가만가만 흘러가는 잔물결 냇물은 바람에게 말없이 등을 내민다 천 마리의 학, 그 울음을 업고 유유히 흐르던 물가에 앉으니 아코디언처럼 접히고 펴지는 오후 겹겹이 흔들리며 다가오는 저 낯익은 물주름 어스름 내리는 물이랑 속으로 달려가 무너질 듯 안겨들면 구순의 아버지 노을빛에 잠겨 봄밤을 흐르고 있다 *안양 인덕원의 냇가. 천 마리 학이 내려와 살았다는 전설이 깃든 곳.

읽고 싶은 시 2013.11.26

무등의 노래 / 고은

한밤중 고개 숙인 물의 머리를 들어서 듣거라. 무등이 무등만한 소리로 쾅,쾅,쾅, 부르짖는도다. 한밤중 곯아떨어진 흙들아 그 소리에 깨어나 거기 묻힌 주야장천(晝夜長川)의 백골(白骨)도 듣거라. 어느 것 하나인들 우리 포한(抱恨) 우리 억수(億水) 비바람 한밤중 고개 숙인 물의 머리를 들어서 너도 나도 비바람으로 몰려가 밤새도록 우리 동편제(東便制) 무등 함성(喊聲)이 되는도다. 낮의 사람아 나주(羅州) 다시(多侍) 처녀야 보아라. 한여름 초록 귀 막고 광산(光山) 들판 어디에 에비 에미도 없는 자식들 떠돌아다니던가. 구름 조각 하나도 서릿발 같은 기쁨으로 삼키고 극락강(極樂江) 영산강(榮山江)이 눈을 부비며 에비 에미의 평생으로 우러러보는도다. 무등이여 날이 날마다 거기 있어 아침 햇살 삼천장(三千丈)..

읽고 싶은 시 2013.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