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743

부활송 / 구 상

죽어 썩은 것 같던 매화의 옛 등걸에 승리의 화관인 듯 꽃이 눈부시다. 당신 안에 생명을 둔 만물이 저렇듯 죽어도 죽지 않고 또다시 소생하고 변신함을 보느니 당신이 몸소 부활로 증거한 우리의 부활이야 의심할 바 있으랴!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음으로 진리는 있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음으로 정의는 이기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음으로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음으로 우리의 믿음과 바람과 사랑은 헛되지 않으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음으로 우리의 삶은 허무의 수렁이 아니다. 봄의 행진이 아롱진 지구의 어느 변두리에서 나는 우리의 부활로써 성취될 그 날의 누리를 그리며 황홀에 취해있다.

읽고 싶은 시 2022.04.18

인생을 말하라면 / 김현승

인생을 말하라면 모래위에 손가락으로 부귀를 쓰는 사람도 있지만 인생을 말하라면 팔을 들어 한조각 저 구름 뜬 흰구름을 가리키는 사람도 있지만 인생을 말하라면 눈을 감고 장미의 아름다운 가시 끝에 입맞추는 사람도 있지만 인생을 말하라면 입을 다물고 꽃밭에 꽃송이처럼 웃고만 있는 사람도 있기는 있지만 인생을 말하라면 고개를 수그리고 뺨에 고인 주먹으로 온 세상의 시름을 호올로 다스리는 사람도 있지만 인생을 말하라면 나와 내 입은 두손을 내밀어 보인다. 하루의 땀을 쥔 나의 손을 이처럼 뜨겁게 펴서 보인다. 이렇게 거칠고 이렇게 씻겼지만 아직도 질기고 아직도 깨끗한 이 손을 물어 마지않는 너에게 펴서 보인다.

읽고 싶은 시 2022.04.11

섬진강 / 전원범

몇 생을 지나오면서 나눈 사연이기에 저리도 간절한 강이 되었는가 밤물결 더욱 세어서 감당하기 어려운 사랑도 증오도 기쁨도 슬픔도 모두 흐르는 것 내 강가에 와 서면 수줍은 듯 소리를 낮추고 긴긴 이야기만 반짝이고 있구나 누군들 푸른 강 하나 간직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삶의 굽이굽이에 놓이는 설움도 설움의 마디마디에 젖어오는 눈물도 다 풀어져 내리고 있으니 우리네 여윈 잠을 가로 질러와서 침묵으로 흐르는 물살 그립고 그리워도 되돌아오지 못하고 차갑게 깨어나 홀로 길을 가고 있는 강이여

읽고 싶은 시 2022.04.01

차를 나누며 / 전원범

약속할 수 없는 내일 이지만 약속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가을의 잎으로 성(城)을 쌓다가 떠나고 삶의 모서리를 덮어오는 하얀 눈을 밟으며 산그늘이 내리는 시간 오다 가다가 스치는 인연으로 하여 우리는 가끔 이마를 마주하고 몇 마디 낮은 소리를 나누며 뜨거운 차를 마신다 온몸으로 젖어오는 삶의 무게를 풀어 놓고 꽃씨를 받듯 떨리는 손으로 한 모금 마음을 받으며 입술을 적시면 입안에 가만히 번지는 후감(後甘) 채워도 채워지지 않고 비워도 비워지지 않고 늘상 잔 안에 고여 오는 그리움 기약할 수 없는 내일이지만 기약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읽고 싶은 시 2022.03.23

봄이 오면 나는 / 이해인

봄이 오면 나는 활짝 피어나기 전에 조금씩 고운 기침을 하는 꽃나무들 옆에서 덩달아 봄앓이를 하고 싶다 살아있음의 향기를 온몸으로 피워올리는 꽃나무와 함께 나도 기쁨의 잔기침을 하며 조용히 깨어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매일 새소리를 듣고 싶다 산에서 바다에서 정원에서 고운 목청 돋우는 새들의 지저귐으로 봄을 제일 먼저 느끼게 되는 나는 바쁘고 힘든 삶의 무게에도 짓눌리지 않고 가볍게 날아다닐 수 있는 자유의 은빛 날개 하나를 내 영혼에 달아주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조금씩 들뜨게 되는 마음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더욱 기쁘고 명랑하게 노래하는 새가 되고 싶다 봄이 오면 나는 유리창을 맑게 닦아 하늘과 나무와 연못이 잘 보이게 하고 또 하나의 창문을 마음에 달고 싶다

읽고 싶은 시 2022.03.23

삶은 섬이다 / 칼릴 지브란

삶은 고독의 대양 위에 떠 있는 섬 믿음은 바위가 되고 꿈은 나무로 자라는 고독 속에 꽃이 피고 목마른 냇물이 흐르고 오 ! 사람들아 삶은 섬이다 뭍으로부터 멀어져 있고 다른 모든 섬들과도 떨어져있는 섬이다 그대의 기슭을 떠나는 배가 아무리 많다 하여도 그대 해안에 기항하는 배들이 그렇게 많다 하여도 그대는 단지 외로운 섬 하나로 남아 있나니 고독의 운명 속에 헤매이면서 오, 누가 그대를 알 것인가 그대와 마음을 나눌 사람 그대를 이해해 줄 사람 과연 누가 있겠는가

읽고 싶은 시 2022.03.17

三月生 / 김현승

눈보다 입술이 더 고운 저 애는 아마도 진달래 피는 삼월에 태어났을거야 삼월이 다하면 피는 튜울립들도 저 애의 까아만 머리보다 더 귀엽지는 못할거야 저 애는 자라서 아마 어른이 된 후에도 푸라타나스 눈이 틀 때 타고난 그 마음씨는 하냥 부드러울거야 그렇지만 저 애도 삼월이 가고 구월이 가까우면 차츰 그 가슴이 뿌듯해 올거야 어금니처럼 빠끔이 터지는 그 여린 가슴이...... 겨울은 가고 봄은 아직 오지 않는 야릇한 꿈에서 서성일지도 모를거야 수선화 새 순 같은 三月生 저 애는 돌맞이 앞니 같이 맑은 三月生

읽고 싶은 시 2022.03.09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 박노해

인생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나는 너무 서둘러 여기까지 왔다 여행자가 아닌 심부름꾼 처럼 계절 속을 여유로이 걷지 못하고 의미있는 순간을 음미하지도 못하고 만남의 진가를 알아채지도 못한 체 나는 왜 삶을 서둘러 왔던가 달려가다 스스로 멈춰 서지도 못하고 대지에 나무 한 그루 심지도 못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주어진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던가 나는 너무 빨리 서둘러 왔다 나는 삶을 지나쳐 왔다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읽고 싶은 시 2022.03.04

부활송 / 구상

죽어 썩을 것 같은매화의 옛 등걸에승리의 화관인 듯꽃이 눈부시다. 당신 안에 생명을 둔 만물이저렇듯 죽어도 죽지 않고또 다시 소생하고 변심함을 보느니당신이 몸소 부활로 증거한우리의 부활이야 의심할 바 있으랴 !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음으로진리는 있는 것이며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음으로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며우리의 믿음과 바람과 사랑은 헛되지 않으며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음으로우리의 삶은 허무의 수렁은 아니다 봄의 행진 아롱진지구의 어느 변두리에서나는 우리의 부활로써 성취될그날의 우리를 그리며 황홀에 취해있다.

읽고 싶은 시 2022.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