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741

11월 에 / 이해인

나뭇잎에 지는 세월 고향은 가까이 있고 나의 모습 더없이 초라함을 깨달았네 푸른 계절 보내고 돌아와 묵도하는 생각의 나무여 영혼의 책갈피에 소중히 끼운 잎새 하나 하나 연륜 헤며 슬픔의 눈부심을 긍정하는 오후 햇빛에 실리어 오는 행복의 물방울 튕기며 어디론지 떠나고 싶다 조용히 겨울을 넘겨보는 11월의 나무 위에 연처럼 걸려있는 남은 이야기 하나 지금 아닌 머언 훗날 넓은 하늘가에 너울대는 나비가 될 수 있을까 별밭에 꽃밭에 나뭇잎 지는 세월 나의 원은 너무 커서 차라리 갈대처럼 여위어 간다

읽고 싶은 시 2021.10.31

낙엽 빛깔 닮은 커피 / 이해인

하늘이 맑으니 바람도 맑고 내 마음도 맑습니다 오랜 세월 사랑으로 잘 익은 그대의 목소리가 노래로 펼쳐지고 들꽃으로 피어나는 가을 한잎 두잎 나뭇잎이 물들어 떨어질 때마다 그대를 향한 나의 그리움도 한잎 두잎 익어서 떨어집니다 사랑하는 이여 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 어서 조용히 웃으며 걸어 오십시오 낙엽 빛깔 닮은 커피 한잔 마시면서 우리 사랑의 첫마음을 향기롭게 피어 올려요 쓴맛도 달게 변한 우리 사랑을 자축해요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 힘들고 고달팠어도 함께 고마워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조금은 불안해도 새롭게 기뻐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부담없이 서늘한 가을바람 가을하늘 같은 사람이 되기도 해요

읽고 싶은 시 2021.10.28

새벽의 시 / 정호승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알았다 나뭇잎이 나무의 눈물인 것을 새똥이 새의 눈물인 것을 어머니가 인간의 눈물인 것을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알았다 나무들의 뿌리가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새들이 우리의 더러운 지붕 위에 날아와 똥을 눈다는 것이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알았다 거리의 노숙자들이 잠에서 깨어나 어머니를 생각하는 새벽의 새벽이 되어서야 눈물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다

읽고 싶은 시 2021.10.25

또 기다리는 편지 / 정호승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읽고 싶은 시 2021.10.18

저 거리의 암자 / 신달자

어둠 깊어가는 수서역 부근에는 트럭 한 대 분의 하루 노동을 벗기 위해 포장마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이 함께 출렁출렁 야간 여행을 떠납니다 밤에서 밤까지 주황색 마차는 잡다한 번뇌를 싣고 내리고 구슬픈 노래를 잔마다 채우고 빗댄 농담도 잔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속풀이 국물이 짜글짜글 냄비에서 끓고있습니다 거리의 어둠이 짙을수록 진탕으로 울화가 짙은 사내들이 해고된 직장을 마시고 단칸방의 갈증을 마십니다 젓가락으로 집던 산낙지가 꿈틀 상위에 떨어져 온몸으로 문자를 쓰지만 아무도 읽어내지 못합니다 답답한 것이 산낙지 뿐입니까 어쩌다 생애 절반을 속임수에 팔아버린 여자도 서울을 통째로 마시다가 속이 뒤집혀 욕을 게워 냅니다 비워진 소주병이 놓인 플라스틱 작은 상이 휘청거립니다 마음도 다리도..

읽고 싶은 시 2021.10.07

가 을 / 김현승

봄은 가까은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깍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읽고 싶은 시 2021.10.04

달빛 기도 / 이해인

너도 나도 집을 향한 그리움으로 둥근 달이 되는 한가위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빛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우리의 삶이 욕심의 어둠을 걷어 내 좀 더 환해지기를 모난 마음과 편견을 버리고 좀 더 둥글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려니 하늘보다 내 마음에 고운 달이 먼저 뜹니다 한가위 달을 마음에 걸어 두고 당신도 내내 행복하세요 둥글게

읽고 싶은 시 2021.09.23

플라타너스 / 김현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나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오를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놓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이 아니다 !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읽고 싶은 시 2021.08.30

한 송이 수련으로 / 이해인

내가 꿈을 긷는 당신의 연못에 하얗게 떠다니는 한송이 수련으로 살게 하소서 겹겹이 쌓인 평생의 그리움 물 위에 풀어 놓고 그래도 목말라 물을 마시는 하루 도도한 사랑의 불길조차 담담히 다스리며 떠다니는 당신의 꽃으로 살게 하소서 밤마다 별을 안고 합장하는 물빛의 염원 단 하나의 영롱한 기도를 어둠의 심연에서 건져내게 하소서 나를 위해 순간마다 연못을 펼치는 당신 그 푸른 물 위에 말없이 떠다니는 한송이 수련으로 살게 하소서.

읽고 싶은 시 2021.08.17

오늘 쓰는 편지 - 나의 멘토에게 / 천양희

순간을 기억하지 않고 하루를 기억하겠습니다 꽃을 보고 슬픔을 극복하겠습니다 영혼의 주름살을 늘리지 않겠습니다 우울이 우물처럼 깊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가장 슬픈 날 웃을 수 있는 용기를 배우겠습니다 혼자 사는 자유는 비장한 자유라고 떠들지 않겠습니다 살기 힘들다고 혼자 아우성치지 않겠습니다 무인도에 가서 살겠다고 거들먹거리지 않겠습니다 술 마시고 우는 버릇 고치겠습니다 무지막지하게 울지는 않겠습니다 낡았다고 대놓고 말하는 젊은 것들 당장 따끔하게 침놓겠습니다 그러면서 나이 먹는 것 속상해 하지 않겠습니다 나를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겠습니다 결벽과 완벽을 꾀하지 않겠습니다 병에 결코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하루를 생의 전부인 듯 살겠습니다 더 실패하겠습니다

읽고 싶은 시 2021.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