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741

만귀정 가는 길 / 김정희

너무 늦었을까 습향각 연꽃들은 향기를 가두고 초승달의 쓸쓸한 기울기를 별 하나가 받들고 있다 황룡강 강줄기 따라 꼬리를 물던 바람에 묵암정사 푸른 대숲은 울음을 감추고 맞닿은 어깨를 바둥바둥 부여 잡는다 만귀정 배롱나무 꽃잎은 노을빛으로 지는데 숲 사이 벌레들의 집이 무사한지 저녁 안개 떠도는 세 개의 섬 눈물 아롱지는 취석(醉石)을 지나 상사화처럼 붉어진 마음으로 성석(醒石)을 밟는다 사는 일에 틈새가 성글어져 까닭모를 슬픔에 그대 부재중이고 싶을 때 너무 늦지 않게 한 번은 만귀정(晩歸亭)으로 돌아오라 옛 사람 그리운 목소리 가슴에 별 하나 긋고 지나간다.

읽고 싶은 시 2022.08.08

바람이 발자국을 내며 / 김정희

나뭇가지 사이 바람이 물결무늬를 찍는다 발자국은 나이테를 그린다 먹감나무 아래 멈추어 서서 살아온 세월에 대해 이야기 한다 잠시 숨을 멈추고 돌아보면 날줄 씨줄 연초록 봄의 양탄자가 눈부시다 가지마다 탄력있게 매달려 눈뜨는 봄, 불길 같았다 불길 앞에서 손을 녹인다 밤이면 안부를 묻던 별들이 바람의 발자국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봄날에는 바람의 발자국 사이에서 별과 꽃들이 복사된다

읽고 싶은 시 2022.07.31

시간의 풍경 / 김정희

공자님의 궁전 향교 대성전 뜨락에 11월과 12월 사이 시를 쓰는 나뭇잎 시간의 풍경소리에 매달린다 비와 바람, 구름과 햇살이 꽃도 향기도 없는 생각 많은 나뭇잎에 머물면 연한 속살부터 물들었다 바람 부는 날 무사히 지는 나뭇잎과 허공에서 선을 긋는 잔가지들이 내 유년의 기억을 두드리며 쓸쓸히 아름다운 길을 내는 시간의 풍경 속을 걸었다 먼저 떠난 이들이 행복하다 신호를 보내는지 별빛이 푸르게 내리고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라며 달빛도 발자국을 지우는 저녁 조금 무거워진 허공 휘어진 가지에 기댄 한 편의 詩! 지상의 펜촉으로 그린다 화폭 하나 가슴에 남는다

읽고 싶은 시 2022.07.28

인생의 선물 / 사무엘 울만

나는 가시나무가 없는 길을 찾지 않는다 슬픔이 사라지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해가 비치는 날만 찾지도 않는다 여름 바다에 가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햇빛 비치는 영원한 낮만으로는 대지의 초록은 시들고 만다 눈물이 없으면 세월 속에 마음은 희망의 봉우리를 닫는다 인생의 어떤 곳이라도 정신을 차려 갈고 일군다면 풍요한 수확을 가져다주는 것이 손이 미치는 곳에 많이 있다

읽고 싶은 시 2022.07.17

무월*에서 / 전 숙

첩첩한 달빛과 눈 맞추고 귀 맞추어 사랑이라는, 그 가늠할 수 없는 우주가 열리면 대숲도 귀가 열려 하르르하르르 돌담과 속삭이지 등줄기 서늘할 때 무작정 달려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손길에 등을 맡기면 고향집 구들처럼 훈김이 돌지 허기진 마음을 쩍쩍 벌리면 사랑이라는 먹이가 쑥쑥 들어오는 무월이라는 예쁜 이름 * 담양의 마을 이름

읽고 싶은 시 2022.07.13

내가 알아보잖아요 / 전 숙

날마다 같은 장소에서 내리는 할아버지 버스 기사님이 여쭙는다 어르신, 날마다 어디를 그렇게 가세요? 저 앞에 있는 요양원에 갑니다 거기 누가 계세요? 우리 마누라가 있지요 어르신을 알아보세요? 아니요 알아보지도 못하는데 날마다 뭐 하러 가세요? 내가 알아보잖아요 생이란 멍에 같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여정 자신에게 지워진 십자가의 문장을 어떻게 독서하느냐에 생의 빛깔이 달라진다 운 좋게도 그날 아침 버스에서 세상에서 가장 뭉클한 십자가를 만났다.

읽고 싶은 시 2022.07.01

명옥헌* 피에타 / 전 숙

삼복더위에 염화를 풀겠다고 작정한 듯 여름이 폭발한다 온몸이 타오르는 그 열기에 누구라도 델까 봐 맨몸으로 여름의 파편을 다 받아낸 명옥헌 백일홍 생살에 박힌 파편이 꽃으로 핀다 숭얼숭얼 상처가 피어있다 옥처럼 울먹이는 백일홍의 상처 백일을 울어야 상처가 나을 것이다 꽃나무 성인을 호수 성모가 끌어안고 있다 * 담양군 고서면의 정자

읽고 싶은 시 2022.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