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741

원점에 서서 / 전석홍

어느새 출발 지점 다시 돌아왔구나 땅과 하늘 길 굽이굽이 바람서리 이겨내면서 마음호수 잔잔하다 겨루어야 할 일도 안개 속 헤매야 할 일도 의자 다툼마저 이제 없다 파아란 하늘이 마음속 빈자리 가득 메우고 있을 뿐 아지 못한 채 오래 끼고 다녔던 색안경이 사라지고 산과 들, 사람, 정치 뜨락도 있는 그대로 보이는구나 스쳐가는 자연 바람만 상쾌하다

읽고 싶은 시 2023.01.07

겨울강가에 서서 / 전석홍

무심무심 흘러간다 더 낮은 곳으로 차오르는 욕망의 물너울 지워 버리고 둘레 가늠하는 참눈을 뜬 겨울강은 품속 파고드는 물새 발자국도 빈 들판 넘나드는 물꼬자락도 사라졌는데 하늘 내려앉는 눈꽃자리 손사래 치며 얼음 기둥 세우면서 제 갈 길만 가누나 봄 샘물, 여름 시내, 가을 강마루 따라 출렁이며 높낮은 곳 다 굽이쳐온 겨울강이여 깡마른 갈대의 진혼곡에 소리 죽여 수심(水深)으로 흐르는구나 문득 옷깃을 여미며 바라보느니 가슴 물길 가로지르는 저 한 떼의 강물이 내 진실의 거울 맑게 비춰주고 가느니

읽고 싶은 시 2023.01.05

새 해 / 구 상

​ ​ 내가 새로와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 내가 새로워져서 인사를 하면 이웃도 새로와진 얼글을 하고 ​ 새로운 내가 되어 거리를 가면 거리도 새로운 모습을 한다 ​ 지난날의 쓰라림과 괴로움은 오늘의 괴로움과 쓰라림이 아니요 ​ 내일도 기쁨과 슬픔이 수놓겠지만 그것은 생활의 율조일 따름이다 ​ 흰 눈같이 맑아진 내 의식은 이성의 햇발을 받아 번쩍이고 ​ 내 심호흡한 가슴엔 사랑이 뜨거운 새 피로 용솟음친다 ​ 꿈은 나의 충직과 일치하며 나의 줄기찬 노동은 고독을 쫓고 ​ 하늘을 우러러 소박한 믿음을 가져 기도는 나의 일과의 처음과 끝이다 ​ 이제 새로운 내가 서슴없이 맞는 새해 ​ 나의 인생 최고의 성실로서 꽃피울 새해여!

읽고 싶은 시 2023.01.02

상처가 희망이다 / 박노해

​ 상처없는 사랑은 없어라 상처없는 희망은 없어라 ​ 네가 가장 상처받는 지점이 네가 가장 욕망하는 지점이니 ​ 그대 눈물로 상처를 돌아보라 아물지 않은 그 상처에 세상의 모든 상처를 비추니 ​ 상처가 희망이다 ​ 상처받고 있다는 건 네가 살아 있다는 것 상처받고 있다는 건 네가 사랑한다는 것 ​ 순결한 영혼의 상처를 지닌 자여 상처난 빛의 가슴을 가진 자여 ​ 이 아픔이 나 하나의 상처가 아니라면 이 슬픔이 나 하나의 좌절이 아니라면 그대, 상처가 희망이다

읽고 싶은 시 2022.12.28

등 뒤를 돌아보자 / 박노해

​ 12월에는 등 뒤를 돌아보자 앞만 바라보고 달려온 동안 등 뒤의 슬픔에 등 뒤의 사랑에 무심했던 시간들을 돌아보자 ​ 눈 내리는 12월의 겨울나무는 벌거벗은 힘으로 깊은 숨을 쉬며 숨 가쁘게 달려온 해와 달의 시간을 고개 숙여 묵묵히 돌아보고 있다 ​ 우리가 여기까지 달려온 것은 두고 온 것들을 돌아보기 위한 것 내 그립고 눈물나고 사랑스러운 것들은 다 등 뒤에 서성이고 있으니 ​ 그것들이 내 몸을 밀어주며 등불 같은 첫 마음으로 다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니 12월에는 등 뒤를 돌아보자

읽고 싶은 시 2022.12.23

시 인 / 박경리

​ 시인은 사과 한 알갱이 훔치는 것을 옳다 하질 말라 비록 그들이 가난할지라도 ​ 시인은 시기의 암울한 눈빛 그것을 어찌 당연하다 할 것인가 그들에게 여벌이 없을지라도 ​ 옳다 함은 그들을 기만하는 것 당연하다는 것도 그들을 경멸하기 때문이며 진실이 아니다 ​ 저 역사의 봉우리 봉우리 기만하고 경멸하며 백성들 울음 모아 진군한 영웅들 혁명의 황금알은 저이가 먹고 벌판으로 내어 쫓긴 백성들 ​ 시인은 어느 누구에게도 영혼 팔지 말고 권리 못지않게 의무 행하며 생명의 존엄 도도하게 노래하라 해야 한다

읽고 싶은 시 2022.12.16

바닷가에서 / 오세영

​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거기 있다. ​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 있다. ​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

읽고 싶은 시 2022.11.21

꺼지지 마라 / 박노해

​ 마르지 마라 마르지 마라 눈물이여 강물이여* 삭막하고 메마른 세상을 적시는 사랑의 눈물이여 아픈 날들을 품고 흐르는 큰 울음이여 눈물의 은총이여 꺼지지 마라 꺼지지 마라 불빛이여 눈빛이여 비정하고 두터운 망각을 밝히는 어둠 속의 촛불이여 어려움이 많은 마음에 밝혀 든 희망의 불씨여 촛불의 기도여 멈추지 마라 멈추지 마라 사랑이여 저항이여 낡아진 혁명을 새로이 혁명하는 젖은 눈의 그대여 다시 새벽에 길 떠나는 떨리는 걸음이여 이슬 맺힌 꽃이여 ​ *괴테에게서 일부 따옴

읽고 싶은 시 2022.11.13

11 월 / 오세영

​ ​ 지금은 태양이 낮게 뜨는 계절 돌아보면 다들 떠나갔구나 제 있을 꽃자리 제 있을 잎자리 빈 들을 지키는 건 갈대뿐이다 상강( 霜降) 서릿발 차가운 칼날 앞에서 꽃은 꽃끼리, 잎은 잎끼리 맨땅에 스스로 목숨을 던지지만 갈대는 호올로 빈 하늘을 우러러 시대를 통곡한다 시들어 썩기보다 말라 부서지기를 택하는 그의 인동(忍冬) 갈대는 목숨들이 가장 낮은 땅을 찾아 몸을 눕힐 때 오히려 하늘을 향해 선다 해를 받든다

읽고 싶은 시 2022.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