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점에 서서 / 전석홍 어느새 출발 지점 다시 돌아왔구나 땅과 하늘 길 굽이굽이 바람서리 이겨내면서 마음호수 잔잔하다 겨루어야 할 일도 안개 속 헤매야 할 일도 의자 다툼마저 이제 없다 파아란 하늘이 마음속 빈자리 가득 메우고 있을 뿐 아지 못한 채 오래 끼고 다녔던 색안경이 사라지고 산과 들, 사람, 정치 뜨락도 있는 그대로 보이는구나 스쳐가는 자연 바람만 상쾌하다 읽고 싶은 시 2023.01.07
겨울강가에 서서 / 전석홍 무심무심 흘러간다 더 낮은 곳으로 차오르는 욕망의 물너울 지워 버리고 둘레 가늠하는 참눈을 뜬 겨울강은 품속 파고드는 물새 발자국도 빈 들판 넘나드는 물꼬자락도 사라졌는데 하늘 내려앉는 눈꽃자리 손사래 치며 얼음 기둥 세우면서 제 갈 길만 가누나 봄 샘물, 여름 시내, 가을 강마루 따라 출렁이며 높낮은 곳 다 굽이쳐온 겨울강이여 깡마른 갈대의 진혼곡에 소리 죽여 수심(水深)으로 흐르는구나 문득 옷깃을 여미며 바라보느니 가슴 물길 가로지르는 저 한 떼의 강물이 내 진실의 거울 맑게 비춰주고 가느니 읽고 싶은 시 2023.01.05
새 해 / 구 상 내가 새로와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내가 새로워져서 인사를 하면 이웃도 새로와진 얼글을 하고 새로운 내가 되어 거리를 가면 거리도 새로운 모습을 한다 지난날의 쓰라림과 괴로움은 오늘의 괴로움과 쓰라림이 아니요 내일도 기쁨과 슬픔이 수놓겠지만 그것은 생활의 율조일 따름이다 흰 눈같이 맑아진 내 의식은 이성의 햇발을 받아 번쩍이고 내 심호흡한 가슴엔 사랑이 뜨거운 새 피로 용솟음친다 꿈은 나의 충직과 일치하며 나의 줄기찬 노동은 고독을 쫓고 하늘을 우러러 소박한 믿음을 가져 기도는 나의 일과의 처음과 끝이다 이제 새로운 내가 서슴없이 맞는 새해 나의 인생 최고의 성실로서 꽃피울 새해여! 읽고 싶은 시 2023.01.02
상처가 희망이다 / 박노해 상처없는 사랑은 없어라 상처없는 희망은 없어라 네가 가장 상처받는 지점이 네가 가장 욕망하는 지점이니 그대 눈물로 상처를 돌아보라 아물지 않은 그 상처에 세상의 모든 상처를 비추니 상처가 희망이다 상처받고 있다는 건 네가 살아 있다는 것 상처받고 있다는 건 네가 사랑한다는 것 순결한 영혼의 상처를 지닌 자여 상처난 빛의 가슴을 가진 자여 이 아픔이 나 하나의 상처가 아니라면 이 슬픔이 나 하나의 좌절이 아니라면 그대, 상처가 희망이다 읽고 싶은 시 2022.12.28
등 뒤를 돌아보자 / 박노해 12월에는 등 뒤를 돌아보자 앞만 바라보고 달려온 동안 등 뒤의 슬픔에 등 뒤의 사랑에 무심했던 시간들을 돌아보자 눈 내리는 12월의 겨울나무는 벌거벗은 힘으로 깊은 숨을 쉬며 숨 가쁘게 달려온 해와 달의 시간을 고개 숙여 묵묵히 돌아보고 있다 우리가 여기까지 달려온 것은 두고 온 것들을 돌아보기 위한 것 내 그립고 눈물나고 사랑스러운 것들은 다 등 뒤에 서성이고 있으니 그것들이 내 몸을 밀어주며 등불 같은 첫 마음으로 다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니 12월에는 등 뒤를 돌아보자 읽고 싶은 시 2022.12.23
시 인 / 박경리 시인은 사과 한 알갱이 훔치는 것을 옳다 하질 말라 비록 그들이 가난할지라도 시인은 시기의 암울한 눈빛 그것을 어찌 당연하다 할 것인가 그들에게 여벌이 없을지라도 옳다 함은 그들을 기만하는 것 당연하다는 것도 그들을 경멸하기 때문이며 진실이 아니다 저 역사의 봉우리 봉우리 기만하고 경멸하며 백성들 울음 모아 진군한 영웅들 혁명의 황금알은 저이가 먹고 벌판으로 내어 쫓긴 백성들 시인은 어느 누구에게도 영혼 팔지 말고 권리 못지않게 의무 행하며 생명의 존엄 도도하게 노래하라 해야 한다 읽고 싶은 시 2022.12.16
바닷가에서 / 오세영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 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 읽고 싶은 시 2022.11.21
꺼지지 마라 / 박노해 마르지 마라 마르지 마라 눈물이여 강물이여* 삭막하고 메마른 세상을 적시는 사랑의 눈물이여 아픈 날들을 품고 흐르는 큰 울음이여 눈물의 은총이여 꺼지지 마라 꺼지지 마라 불빛이여 눈빛이여 비정하고 두터운 망각을 밝히는 어둠 속의 촛불이여 어려움이 많은 마음에 밝혀 든 희망의 불씨여 촛불의 기도여 멈추지 마라 멈추지 마라 사랑이여 저항이여 낡아진 혁명을 새로이 혁명하는 젖은 눈의 그대여 다시 새벽에 길 떠나는 떨리는 걸음이여 이슬 맺힌 꽃이여 *괴테에게서 일부 따옴 읽고 싶은 시 2022.11.13
11 월 / 오세영 지금은 태양이 낮게 뜨는 계절 돌아보면 다들 떠나갔구나 제 있을 꽃자리 제 있을 잎자리 빈 들을 지키는 건 갈대뿐이다 상강( 霜降) 서릿발 차가운 칼날 앞에서 꽃은 꽃끼리, 잎은 잎끼리 맨땅에 스스로 목숨을 던지지만 갈대는 호올로 빈 하늘을 우러러 시대를 통곡한다 시들어 썩기보다 말라 부서지기를 택하는 그의 인동(忍冬) 갈대는 목숨들이 가장 낮은 땅을 찾아 몸을 눕힐 때 오히려 하늘을 향해 선다 해를 받든다 읽고 싶은 시 2022.11.06
소금 꽃 / 강 만 염전에 꽃이 핀다 오뉴월 땡볕 아래 염부 만덕이의 당그레 질이 지난하다 밀고당기고 밀고당기고 염전 가득 흰 개망초꽃 흐드러진다 자식 놈 학자금 마누라 약값 짊어진 만덕이의 젖은 등짝에도 꽃은 허옇게 피어 별처럼 눈부시다 읽고 싶은 시 2022.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