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741

돌부처 / 강 만

그 절간 뒤에는 늙은 돌부처 하나 서있다 처음 돌 속에서 나왔을 때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 돌부처였다 세상에 오래 살며 배고픈 비바람에게 귀도 떼어주고 입도 떼어주고 아들 못 난 아낙에게는 코도 떼어주다 보니 두리뭉실 흔적만 남았다 세상의 측은한 것들에게 몸 다 내어주고 적막한 절간 뒤에서 이제는 다시 돌이 되어가고 있었다.

읽고 싶은 시 2022.10.23

진달래 고개 / 송규호

푸른 산 푸른 바람 바람이 불면그 님이 오신다는 진달래 고개그리운 가지마다 망울이 지면산새도 어서 오라 노래하리라아 ! 웃는 얼굴 옛사랑이저기 오시네. 푸른 산 푸른 바람 바람이 불면그 님이 가신다는 진달래 고개그리운 가지마다 노을이 지면산새도 다시 오라 노래하리라아 ! 웃는 얼굴 옛사랑이저기 가시네. 송규호 수필집 가랑잎사연 中업혀 내려온 운장산에서눈에 덮힌 진달래 고개에 누워

읽고 싶은 시 2022.10.14

다시 9월이 / 나태주

기다리라, 오래오래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지루하지만 더욱 이제 치유의 계절이 찾아온다 상처받은 짐승들도 제 혀로 상처를 핥아 아픔을 잊게 되리라 가을 과일들은 봉지 안에서 살이 오르고 눈이 밝고 다리 굵은 아이들은 멀리까지 갔다가 서둘러 돌아오리라 구름 높이, 높이 떴다 하늘 한 가슴에 새하얀 궁전이 솟았다 이제 제각기 가야 할 길로 가야 할 시간 기다리라, 더욱 오래오래 그리고 많이. ( 2007 )

읽고 싶은 시 2022.09.21

이제는 아담을 만나고 싶다 / 김효비아

태초에 모든 언어는 아담이 지었다 나 오늘 밤 발가벗고 그대에게 가리 태초의 언어 중 가장 아름다운 한 마디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 하이데거가 지은 언어의 집에서 복화술을 배우며 옹알이하다 미쳐서 죽을 때까지 말의 부스러기로 만든 땟목을 밀고 언어의 집, 그 아롱지는 광휘의 은하수로 가리 아니, 아니, 그 전에 이 지상을 태운 돌개바람 때문에 가슴 속 소용돌이치는 불길일랑, 얼음을 깨문 혀로 핥으며 타락한 들개의 등을 타고 떠난 처녀성을 찿아서 나 오늘밤은 언어의 옷을 지어입고 존재의 치부와 자존심, 마지막 그 곳만을 가리고 아담이 기다리는 에덴동산으로 가리.

읽고 싶은 시 2022.09.18

달 밤 - 세한도(歲寒圖)에 붙여 / 김효비아

내 나이 종심(從心)이 되었을 때 '추사의 졸(拙)'같은 거울을 빌려 쨍쨍한 몰골을 보아야겠다 벌거숭이 임금님 옷자락을 슬그머니 탐낸 적도 있었다 나는 무아지경에 탐닉한 비계덩어리 치부를 어떻게 가릴까 누더기 마파람에 게눈처럼 오지랖을 여미기나 했을까 설마하니, 나에게도 이상적(李尙迪) 같은 동무 하나 있다면 세한도(歲寒圖)의 우정을 맹세해 볼 것인가 조무견(曺楙堅)은 세한도에 화답하고자 수선화를 시로 지었다하고, 조진조(趙振祚)는 꿩이 집을 안 짓는 것은 그 정신의 뿌리를 보존하기 위함이다 하였거늘 나는 엉거주춤 청맹과니로 실사구시(實事求是)나 따라 해볼까 나도 정녕 소나무 같은 그대를 만나 벼루에 구멍이 나도록 동자체(童子體)를 배울까 바위틈에서 서릿발을 삼킨 송백을 배경삼아 동자처럼 엎드려 추사체(..

읽고 싶은 시 2022.09.16

나비와 나방 / 김효비아

밤물결의 향기를 좋아한다는 너도 처음엔 나비였다고 한탄을 했어 밤마다 날개를 접고 더듬이로 기어가다가 온 몸의 뼈마디가 쑤신 동료들끼리 만나서 가로등 아래에서 잠깐 한눈을 팔다가 이름표가 바뀌었을 뿐이라고 했어 잃어버린 한쪽 날개에 대하여 애통해 하거나 어깨 죽지에 실금이 가서 울먹거리는 나비들에 대하여 낮과 밤을 차별하는 정글의 법칙을 모르는 애송이라고 차마 귓속말을 하겠지 너는 나비의 눈물을 보지 못한 척해 나비는 꽃이 되려다 독버섯에 취하거나 여왕벌의 발톱에 숨을 죽이거나 장미가시에 찔리기도 한다는 걸 모를거야 우리의 공통점은 날개가 있다는 것과 더듬이와 페르몬, 그리고 늘 하늘을 동경한다는 거야 또 있어 우리를 세상에 보내준 어머니가 말씀하셨어 우리는 한 핏줄이라고 나는 너를 나비라고 부를 거야 ..

읽고 싶은 시 2022.09.11

달팽이와 낙타 / 김효비아

나, 달팽이 언젠가 낙타의 등을 타고 고비로 가는 꿈을 꾸었다 사막의 웅덩이에서 빠져죽은 당나귀도 보았다 낙타는 당나귀에게 사막을 걷는 법을 가르쳐 준 적이 있었다 낙타에게도 트라우마가 있다면 실크로드의 낭떠러지에서 미끄러진 기억 뿐이다 평생 아랫목에 누워 잠을 잔 적이 없는 낙타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모래폭풍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여 오아시스로 가는 지름길을 찿아내는 것만이 그나마 서러운 존재로 화인을 찍을 것이다 어느 날, 낙타는 햇살에 멀미를 하면서도 신기루가 왜 허상인지를 맨발로 체험하고 싶은 달팽이를 만났다 모래꽃을 본 적이 없는 달팽이 대신 어린왕자와 사막여우와 어울리는 꿈을 꾸고 싶었다 달팽이는 눈 먼 세상을 더듬으며 바람의 언덕까지 혼자 올라갔다 그날 밤, 발길질하는 낙타의..

읽고 싶은 시 2022.09.07

겨울 호수의 민낯 / 김효비아

이렇게 바닥이다 이런 날이 오리라 몰랐다면 외눈박이의 변명이다 살아온 징검다리를 헤아리면서 몇 번쯤 발등을 찍었던 충격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백치의 헛웃음이다 마른 억새처럼 건너가는 겨울 호수의 종아리에 푸른 멍 자국이 드러나고 있는 것은 땅 속의 실핏줄의 맥박은 발끝까지 뻗어가고 뿌리들의 숨구멍도 목울대를 넘어가고 있었는데 그러니 철새들을 태운 배가 바닥까지 가라낮지 않았다면 이렇게 갈라지고 터진 西湖*의 뒤꿈치를 보았을까 그런데 아니다 본디 진흙바닥에 앉지 않으려는 연잎의 본능은 뿌리의 앙가슴 허파에서 부터 들숨 날숨으로 견디는 것 뿐 훤히 드러난 겨울 호수의 민낯을 보고서야 알았다 저기 허공과 바닥 사이 해오라기 한 마리도 겨울 호수의 민낯을 보았다. * 西湖 : 광주시 서구 운천동에 위치한 운천저수지.

읽고 싶은 시 2022.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