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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루 나무를 키우기 위해 / 전석홍

나무 한 그루 키우기 위해 낮이면 들판에서 논흙과 살고 밤이면 짚 일로 새벽닭 홰치는 소리 들었네 나무 자랄 때까지 허리끈 졸라매며 묵숨 물 대어 주고 퇴비 삭여 영양분 뿌려 주면서 잡풀 한 뿌리 한 뿌리 뽑아내 키웠네 그 나무 잘 자라 청그림자 드리우고 열매 싱그러운데 시원한 그늘 한 번 앉아 보지 못하고 열매 한 알 혀끝에 대보지 못한 채 바람서리 가득 서린 그 분, 노을 등에 지고 어느 산골 넘었는가 나무만 외로이 서 있네

읽고 싶은 시 2023.11.29

신록예찬(新綠禮讚) / 이양하

봄, 여름, 가을, 겨울, 두루 사시(四時)를 두고 자연이 우리에게 내리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그 중에도 그 혜택을 풍성히 아낌없이 내리는 시절은 봄과 여름이요, 그 중에도 그 혜택을 가장 아름답게 나타내는 것은 봄, 봄 가운데도 만산(滿山)에 녹엽(綠葉)이 싹트는 이 때일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 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 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

왕빠갑빠 / 유병석

지난 70년대의 어느 세월에 있었던 이야기다. 명실상부한 대학의 전임교수였지만 툭하면 학교가 문을 닫는지라 나는 실업자와 같이 집에서 뒹굴며 지내기 일쑤였다. 문을 닫는 시절이 마침 가장 화창한 계절인 4,5월이거나 생기가 나는 때인 9, 10월이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아니하고 풀 수 없는 울분이 치솟아 집에서 혼자 소주잔이나 홀짝대고 허송세월한 도리 밖에 없었던 시대. 왕빠, 깝빠, 땅꼬마, 풀떼기 등의 기발한 딱지 용어를 이때 배웠다. 아내는 돈 벌러 가게에 나가고 큰놈들은 학교에 나간 고즈넉한 오전이면 푸른 바다 넓은 백사장에서 하루 종일 게와 노니는 심정으로 네 살짜리 막내와 집을 지키며 놀았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놀 때 어른이 아이가 되어야지, 아이가 어른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나는 그..

봄이 오는 소리 / 전석홍

입춘날 오솔길을 걸어간다 서려있는 봄기운이 오감을 타고 온몸에 스미어 온다 칼바람 눈보라 묵묵히 견디어 온 앙상한 나무들 희물그레한 햇볕에 몸통을 담그고 몹의 연초록 치맛자락 끄는소리 아스라이 출렁여 다가오는가 귓볼 고추세우고 있다 이 나무 저 가지 날아다니는 까치 목청 해맑고 먹이 찾는 비둘기 구구구구 종종걸음 가벼웁다

읽고 싶은 시 2023.11.28

풀꽃 같은 말씀들 / 최은정

지리산을 사백 번 가보고나니 그때서야 산이 보이더라는 어느 산악인의 말이 떠오른다. 내 나이 일흔하고도 넷이다. 나는 이제야 눈이 뜨이고 귀가 트이는가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 알베로니는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주변에서 들을 수 있는 좋은 말들을 모아두는 어록 수첩을 만들었다. 많이 듣고 보고 그 가운데 좋은 것을 가려서 따르고 기억해 둔다면, 나도 풀꽃 같은 아름다운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곡성 돌실나이 삼베 기능 보유자인 김점순 할머니의 말씀으로 일꾼 옷은 넉 새, 한량 옷은 여섯 새, 원님 옷은 아홉 새 삼베를 썼다 한다. 바람 솔솔 통하는 넉 새 삼베가 으뜸이겠지만 곱기로 치면 아홉 새 삼베가 그 중 곱다고 한다. 김점순 할머니께 아홉 새 삼..

오아시스와 신기루 / 변해명

공항에 나와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서둘러 떠나는 사람과 안도의 몸짓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이별하기 힘겨워 손을 놓지 못하는 사람과 가족의 마중에 덥석 얼싸안고 피로를 지우는 사람들, 낯 선 이국에 맞아줄 사람을 기웃거리며 찾는 사람들… 맞고 보내는 사람들 속에서 나도 여행자가 되어본다. 모두는 생각의 오아시스를 찾아 떠나고, 새로운 떠남을 꿈꾸며 돌아오는 사람들이다. 나도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해 출발을 서두르는 사람처럼 공연히 마음이 들뜬다. 일상을 탈출하고 싶은 여행자들은 모처럼 휴가를 만들어 쉴 곳을 찾아 떠날 것이다. 아니면 새로운 세계에 접하고 싶고, 그 분야를 내 일상에 접목하고 싶어 도전을 안고 떠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여행자들은 이국의 풍물에 젖어보고 싶어 둥지를 잠시 벗어..

구상 시인의 모자 / 구 활

구상 시인에게는 항상 가을 냄새가 난다. 가을에 처음 뵈었기 때문이리라. 시인에게서 가을 외에는 다른 계절의 이미지는 느낄 수가 없다. 가을 남자. 그래. 뭔가 조금은 쓸쓸하고 만남 보다는 떠남이 좀 더 어울리는 그런 남자가 구상 시인이다. 시인을 처음 뵌 것은 삼십 여 년 전인 칠십 년대 초, 플라타너스의 잎들이 돌가루 포대 색깔을 하고 도로를 질주하는, 가을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었다. 시인은 옅은 갈색 코트에 걸 맞는 중절모를 쓰고 이 세상 모든 것을 너그럽게 포용하고 그리고 용서할 수 없는 자들에게도 자비를 베풀 것처럼 약간은 어눌한 말투를 앞세우고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나셨다. “활(活)이라 그랬지.” “예” “그래 사회부 기자라며.” “예” 시인은 내가 근무하던 신문사의 편집부국장이자 집안 조카..

진달래 고개 / 윤소천

나의 어린 시절에는 봄이면 참꽃이라 불리는 진달래가 산과 들에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그런데 요즈음은 산골에서도 보기 힘든 귀한 꽃이 되었다. 오늘은 이 진달래꽃을 보러 남쪽 강진 주작산을 찾아간다. 주작산朱雀山은 봉황이 날개를활짝 펴고 날아오르는 듯해 지어진 이름이다. 주작산과 이어져있는 덕룡산德龍山은 웅장하면서 봉우리가 창끝처럼 높이 솟아있는데 동봉과 서봉 사이에는 초원 능선이넓게 펼쳐져 있다. 이곳의 4월은 진달래꽃으로 장관을 이룬다.​앞서 간 차를 따라 산길을 오르는데, 어느새 고갯마루에 다다랐다. 바위 봉우리 사이사이에 피어 산 능선을 덮고 있는 진달래꽃이, 황홀한 선경을 이루어 신세계를 펼쳐 놓았다. 고개에 올라 진달래꽃에 취해있는데 학창시절 좋아 부르곤 했던 ‘바위고개’가 생각난다.​ '바위고..

소천의 수필 2023.11.23

인생이 너무나 아름답다 / 박경리

지내다 보니 기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오래 앓아온 고혈압과 당뇨병으로 눈도 나빠지고 병이 여러 가지 겹치다 보니 몸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되도록 병원에 가지 않고 견디려고 하는데, 그러다 보니 병이 더 심하게 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살 만큼 산 사람으로서 자꾸 아프다고 말하자니 한편 민망한 일이기도 합니다. 몸이 아프면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일을 못 하는 것입니다. 몸이 쇠약해지면 들지도 못하고 굽히지도 못하니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일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일은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일이 보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프다는 것, 죽는다는 것은 생명의 본질적인 작용인 일을 못 하는 것이기에 절망적입니다. 죽음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