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풀꽃 같은 말씀들 / 최은정

윤소천 2023. 11. 27. 19:28

  

 

 

 

 

 지리산을 사백 번 가보고나니 그때서야 산이 보이더라는

어느 산악인의 말이 떠오른다. 내 나이 일흔하고도 넷이다. 나는

이제야 눈이 뜨이고 귀가 트이는가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

알베로니는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주변에서 들을 수 있는 좋은 말들을 모아두는 어록 

수첩을 만들었다. 많이 듣고 보고 그 가운데 좋은 것을 가려서 따르고

기억해 둔다면, 나도 풀꽃 같은 아름다운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곡성 돌실나이 삼베 기능 보유자인 김점순 할머니의 말씀으로

일꾼 옷은 넉 새, 한량 옷은 여섯 새, 원님 옷은 아홉 새 삼베를 썼다 한다.

바람 솔솔 통하는 넉 새 삼베가 으뜸이겠지만 곱기로 치면

아홉 새 삼베가  그 중 곱다고 한다. 김점순 할머니께 아홉 새 삼베

낳는 비법을 물었더니 '베틀 앞에 앉을 때부터 아홉 새 정신으로

앉아야한다,'고 했다. 마음을 뭉그리고 중심을 잡고 오장을 다 쏟고

눈정신 마음 정신을 베틀 위에다 바쳐야만 되는 것이란다.

 

화내고 하면 베틀이 먼저 화를 낸단다. 어떻게 화를 내느냐하면

실오락지가 그만 우두둑 떨어져 버린다 했다. 고운 베를 짜려고 고운 마음

바른 마음 그 하나만 꽉 붙들고 살았다 한다. 그리도 고운 모습으로 살다

가신 할머니의 우물같이 깊은 말씀 가슴마다 서린 말씀이 풀꽃향기처럼

남아 있다. 순천 송광면 왕대마을 윤순심 할머니는 말했다.

“우리 손자가 공부하고 있으면, 아가 공부 많이 한 것들이 다 도둑놈

되드라. 맘공부를 해야 한다. 인간 공부를 해야 한다.

그렇게 말해.” 인간을 만들지 공부벌레 만들지 마라. 입신양명을 위해

인성을 멀리하고 지식만 채워 주려는 부모들이 대부분인데

무조건 공부를 잘하고 봐야한다는 부모들의 말씀보다 할머니의 말씀이

싹이 나고 꽃이 폈으면 좋겠다. 고흥 외나로도 백초마을의

할머니. 해거름에 커다란 보퉁이를 이고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할머니께 짐 풀어 나를 다오 했더니 '개버워, 안무거와,

안시랑토 안허당께. 하이고 이런 것이 무거우면 시상 어치게 산당가.'

땡볕에, 무서리를, 비바람을, 천둥 번개 우박 쏟아지는

그러한 세월을 견뎌 오셔서 이리 깊어지셨는가.

 

 평상 만들기가 취미인 한 할아버지는 어디라도 쉴 만한

곳이 있으면 궁둥이를 편히 붙이라고 평상을 놓는다. 그 비법은 남의

얼굴에 웃음 피게 하는 맛을 알고 나면 저절로 되는 일이라고 한다.

 '담 밖에 나간 것은 남의 것이라요. 따 자셔. 맘대로 따 자셔.' 조막례

할머니 댁에 가서 앵두 따먹고 싶다. 넉넉해서 나누는 게 아니라

나누고 나니 넉넉해지는 것이다.  '늙은 몸뚱이는 일이 보약이여.자꾸

몸을 움직여 줘야 덜 망가지고 건강해.” 밭 일구고 고랑을 타고 씨

뿌리고 김을 매기도 하는 것이 호미이니 이른 봄부터 가을걷이 끝날

때까지 할매 손은 늘 호미자루를 놓지 않았다.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호미를 수십 개 썼지. 순전히 호미로 해서 곡식 키우고 자식들 키웠지.

호미로 밭에다 공부를 했으면 박사가 됐을 거”라는 할매. “쇠같이

강한 것이 있을까. 허기사 쇠만큼 강한 것이 몸뚱아리여. 한평생 써 묵고도 

안직 덜 닳아졌당께.” 살아 온 날이 기적이고 살아 갈 날이 기적인 삶.

더덕 같은 손을 가졌지만 그 속에서 나온 말씀들 풀꽃향기처럼 풋풋하다.

 

 나의 혼기 때 친정 아버지는 "남녀가 연애할 때는

좋은 같이 하는 것이고 결혼은 힘든 걸 같이 하는 거다.”라 하셨다.

 남녀가 놀기는 쉬워도 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가볍게

흘려버릴 수 없는 말이다. '복은 곡식 같은 것이어서 복을 심고 복을

기르고 복을 쌓고 복을 아낄 때 비로소 거둘 수 있는 것이다.”라는

말씀 되새긴다. '놈(남) 괴롭게 허는 재주 없는 것도 큰 복이여.

(남원 흥부마을 어르신들)' 좋은 말들이 씨가 되어 널리널리 퍼져라.

 

 어릴 적, 삼대독자의 맏딸로 태어난 나는 조동버릇으로

커서 무엇이든지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했다. 잊히지 않은 일은 모시옷에

풀을 먹여 곱게 다려 입혔건만 빳빳하고 거추장스럽다고

물속에 그대로 담가버린 일이다. 그럴 때 할머니는 '저 파싹 꼬라지,

당목에 물 들여논 것 같다.'고 했다. 그런 내가, 보잘 것 없는 작은

소나무가 자라면서 천둥번개 맞고 폭풍우에 찢기고 눈 덮여 꺾이며

옆 나무를 피해 구부리어 다듬어 가듯, 내 모습도 한 그루

소나무처럼 다듬어져 가기를 갈망한다. 물들인 당목은 햇볕에

바래면 다시 하얗게 된다. 당목은 빛이 바랠수록 빛이 난다.

잔잔한 풀꽃 같은 말씀이 내게 스치면서 다독인다.

 

 내려 갈 때 보았네. 올라 갈 때 못 본 그 꽃.

 

  고 은  < 그 꽃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