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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 오세영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 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 유성처럼 소리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무를 위해서 꿈이 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 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 안쓰러 마라. 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사랑은 성숙하는 것. 화안히 밝아 오는 어둠 속으로 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 눈 떠라, 절망의 그 빛나는 눈.

읽고 싶은 시 2023.12.28

겨울 사랑 / 박노해

​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읽고 싶은 시 2023.12.28

성탄 편지 / 이해인

친구여, 알고 계시지요? 사랑하는 그대에게 제가 드릴 성탄 선물은 오래 전부터 가슴에 별이되어 박힌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 안에 꽃피고 열매 맺은 우정의 기쁨과 평화인 것을. 슬픈 이를 이해하고 미운 이를 용서하며 우리 모두 누군가의 집이 되어 등불을 밝히고 싶은 성탄절 잊었던 이름들을 기억하고 먼데 있는 이들을 가까이 불러들이며 문을 엽니다. 죄가 많아 숨고 싶은 우리의 가난한 부끄러움도 기도로 봉헌하며 하얀 성탄을 맞이해야겠지요? 자연의 파괴로 앓고 있는 지구와 구원을 갈망하는 인류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 다시 그대에게 드립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새로이 태어나는 주님의 뜻을 우리도 성모님처럼 겸손이 받아 안기로 해요. 그동안 못다 부른 감사의 노래를 함께 부르기로 해요. 친구여, 알고 계..

읽고 싶은 시 2023.12.23

그 네 / 정호승

너도 그네를 타보면 알거야 사랑을 위해 수평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그동안 네가 수평을 유지해본 적이 없어 한없이 슬펐다는 것을 오늘은 빈 그네를 힘껏 밀어보아라 그네가 중심을 잡고 고요히 수평의 자세를 갖추지 않느냐 너도 너의 가난한 사랑을 위해 수평의 자세를 갖추기 위해 진실해라 너는 한 때 좌우로 혹은 위아래로 흔들리지 않으면 그네가 아니라고 더 높이 떠올라 산을 넘어가야 한다고 마치 손이라도 놓을 듯 그네를 탔으나 결국 그네는 내려와 수평의 자세를 잡지 않더냐 사랑한다는 것은 늘 그네를 타는 일이므로 부디 그네에서 뛰어내리지는 마라 수평인 그대로 고요해라

읽고 싶은 시 2023.12.18

버들잎 강의 / 신달자

강의실은 구 층에 있었다 지하 삼 층 차고에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한순간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일이 나에겐 예삿일이다 높은 곳을 죽 올라가는 그 재미로 계단을 잊은지 오래다 아 지겨워 하나하나 밞아 언제 오르나 단숨에 잡아 보려 했던 북두칠성 아직 멀어서 나는 오로지 오르는 일에 길들고 비행을 섬긴다 그렇게 쑤욱 솟구쳐 올라가서 강의실에선 낮아지는 걸 가르친다 문학이란 적어도 낮아져 바짝 엎드려 바닥의 그늘을 줍는 것이라고 그늘의 속잎을 끌어내고 나무의 속말을 듣는 것이라고 저 버들잎을 보아라 모든 나무는 하늘 무섭지 않게 뻗어 오르는데 저 버들잎만 겸허히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려 자신의 공간을 비워주고 있지 않느냐 비워주는 일은 마음을 보는 사람만이 하는 일이다 몸을 낮춰야 마음이 보여 그래야 푸른 피가 ..

읽고 싶은 시 2023.12.10

창문 / 정호승

창문은 닫으면 창이 아니라 벽이다 창문은 닫으면 문이 아니라 벽이다 창문이 창이 되기 위해서는 창과 문을 열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세상의 모든 창문이 닫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열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데에 평생이 걸렸다 지금까지는 창문을 꼭 닫아야만 밤이 오는 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창문을 열었기 때문에 밤하늘에 별이 빛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제 창문을 연다 당신을 향해 창문을 열고 별을 바라본다 창문을 열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당신의 모습이 보인다

읽고 싶은 시 2023.12.10

그리운 강 / 도종환

사람들은 늘 바다로 떠날 일을 꿈꾸지만 나는 아무래도 강으로 가야겠다 가없이 넓고 크고 자유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작고 따뜻한 물소리에서 다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해일이 되어 가까운 마을부터 휩쓸어버리거나 이 세상을 차갑고 거대한 물로 덮어버린 뒤 물보라를 날리며 배 한 척을 저어나가는 날이 한 번 쯤 있었으면 하지만 너무 크고 넓어서 많은 것을 가졌어도 아무 것도 손에 쥐지 못한 것처럼 공허한 바다가 아니라 쏘가리 치리 동자개 몇 마리만으로도 넉넉할 수 있는 강으로 가고 싶다 급하게 달려가는 사나운 물살이 아니라 여유 있게 흐르면서도 온 들을 다 적시며 가는 물줄기와 물살에 유연하게 다듬어졌어도 속으론 참 단단한 자갈밭을 지나 천천히 천천히 걸어오고 싶다 욕심을 버려서 편안한 물빛..

읽고 싶은 시 2023.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