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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복 / 도종환

이른 봄에 내 곁에 와 피는 봄꽃만 축복이 아니다 내게 오는 건 다 축복이었다 고통도 아픔도 축복이었다 뼈저리게 외롭고 가난했던 어린날도 내 발을 붙들고 떨어지지 않던 스무 살 무렵의 진흙덩이 같던 절망도 생각해 보니 축복이었다 그 절망 아니었으면 내 뼈가 튼튼하지 않았으리라 세상이 내 멱살을 잡고 다리를 걸어도 길바닥에 팽개치고 어두운 굴속에 가둔 것도 생각해보니 영혼의 담금질이었다 한 시대가 다 참혹하였거늘 거인 같은 바위 같은 편견과 어리석음과 탐욕의 방파제에 맞서다 목숨을 잃은 이가 헤아릴 수 없거늘 이렇게 작게라도 물결치며 살아 있는 게 복 아니고 무엇이랴 육신에 병이 조금 들었다고 어이 불행이라 말하랴 내게 오는 건 통증조차도 축복이다 죽음도 통곡도 축복으로 바꾸며 오지 않았는가 이 봄 어이 ..

읽고 싶은 시 2023.12.08

일상의 행복 / 김남조

스위치 누르자 전등 켜져 밝다 수도에서 더운물 찬물 잘 나온다 냉장고에 일용할 음식의 한 가족 살고 작동 즉시 전율 휘감는 음악 한 그루 나무에도 공생하는 새와 곤충들 있어 저들 숨쉬는 허파와 그 심장 피주머니 숙연하다 그림자 한 필 드리우는 구름과 지척에 일렁이는 바람 손님들 이즈음 왜 이런지 몰라 사는 일 각별히 소중한지 몰라 모든 사람 누군가를 사랑하는 힘으로 준령 오르고 있으리 눈물 말리며 걸으리 그러한 이 세상 참 잘 생겼다고 왜 문득 가슴 움켜잡는지 몰라

읽고 싶은 시 2023.12.02

성탄 밤의 기도 / 이해인

낮게 더 낮게 작게 더 작게 아기가 되신 하느님 빛의 예수여 모든 이가 당신을 빛이라 부르는 오늘 밤은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밤 빛으로 오시는 당신을 맞이하여 우리도 한 점 빛이 되는 빛나는 성탄 밤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을 지니시고 ‘세상’이라는 구유, 우리 ‘마음’이라는 구유 위에 아기로 누워 계신 작은 예수여, 진정 당신이 오시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겐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기쁨도 없습니다 평화도 없습니다 구원도 없습니다 당신이 오심으로 우리는 희망과 기쁨 속에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평화와 구원의 의미를 깊이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티 없이 맑고 천진한 당신이 누우시기엔 너무도 어둡고 혼탁한 세상이오나 어서오십시오 진리보다는 불의가 커다란 언덕으로 솟고 ..

읽고 싶은 시 2023.12.02

한 그루 나무를 키우기 위해 / 전석홍

나무 한 그루 키우기 위해 낮이면 들판에서 논흙과 살고 밤이면 짚 일로 새벽닭 홰치는 소리 들었네 나무 자랄 때까지 허리끈 졸라매며 묵숨 물 대어 주고 퇴비 삭여 영양분 뿌려 주면서 잡풀 한 뿌리 한 뿌리 뽑아내 키웠네 그 나무 잘 자라 청그림자 드리우고 열매 싱그러운데 시원한 그늘 한 번 앉아 보지 못하고 열매 한 알 혀끝에 대보지 못한 채 바람서리 가득 서린 그 분, 노을 등에 지고 어느 산골 넘었는가 나무만 외로이 서 있네

읽고 싶은 시 2023.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