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구상 시인의 모자 / 구 활

윤소천 2023. 11. 25. 19:16

 

 

 

 


구상 시인에게는 항상 가을 냄새가 난다. 가을에 처음

뵈었기 때문이리라. 시인에게서 가을 외에는 다른 계절의 이미지는

느낄 수가 없다. 가을 남자. 그래. 뭔가 조금은 쓸쓸하고 만남

보다는 떠남이 좀 더 어울리는 그런 남자가 구상 시인이다. 시인을 처음

뵌 것은 삼십 여 년 전인 칠십 년대 초, 플라타너스의

잎들이 돌가루 포대 색깔을 하고 도로를 질주하는, 가을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었다. 시인은 옅은 갈색 코트에 걸 맞는 중절모를 쓰고

이 세상 모든 것을 너그럽게 포용하고 그리고 용서할 수 없는 자들에게도

자비를 베풀 것처럼 약간은 어눌한 말투를 앞세우고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나셨다.



“활(活)이라 그랬지.” “예” “그래 사회부 기자라며.”

“예” 시인은 내가 근무하던 신문사의 편집부국장이자 집안 조카인

고 구구서 선생 댁에 다니러 오셨고, 나는 “인사 드려야 할 분이

오늘 서울에서 내려오시니까 잠시 집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구상 시인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시인은 영남일보 주필을 지내신

 언론계 대선배이자 항렬로는 할아버지뻘이어서 “그저 묻는 말씀에

”예 예“ 대답이나 할 뿐 감히 치어다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시인은 자신을 뽐내지도 드러내지도 않았다. 낮은 음자리로

조용조용 얘기했지만 ‘구상’이란 그 이름이 갖고 있는 위엄이 목청 돋우지

않아도 모든 걸 압도하는 듯 했다. 오후 열차 편으로 서울로

올라가시면서 여의도 시범아파트 몇동 몇호란 주소를 쪽지에 적어 주시면서

“혹시 서울에 오면 들리라”고 말씀하셨다. 플랫폼에서 시인을 배웅하며

‘나도 시인의 나이가 되면 저런 모자를 써야지’하고 속으로 다짐을 했다. 그러나

겉멋은 흉내 낼 수 있어도 시인 특유의 고매한 인품은 도저히 따를

없을 것 같아 고개를 모로 흔들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 나는 시인의 연락책 겸 비서

비슷하게 되어 버렸다. 대구로 내려오실 땐 고 이윤수 시인, 최정석 수필가

(전 효성여대 교수), 깡패 시인 고 박용주 선생 등에게 연락하여

모임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일이 나의 소임이었다. 시인의 대구

나들이에는 나 외에 박세환, 고 이무웅 등 두 사람의 양 아들이 항상

함께 했다. 그러니까 촌수로 따지면 두 아들 보다 내가 한 촌수 아래였다.

 그렇지만 주회가 열릴 땐 아들들은 밖에서 시중을 들었지만 손자인

나는 말석에서나마 어른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영광을 누렸다. 하루는 주먹

세계에서 ‘항구’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무웅이가 이렇게 말했다.

 

“아들인 우리는 심부름이나 하고 손자인 활이는 아버지 옆에서

술이나 마시고 이래도 되겠습니까”라며 어리광 섞인 투정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시인은 “할애비는 아들자식 보다 손자가 더 귀한 법이야”하고

입을 틀어막더니 “너희들은 기자가 아니잖아. 신문기자는 누구 하고도

대작할 수 있지”라고 말씀하셨다. 시인은 ‘홍’과 ‘성’이란 두 아들과

‘자명’이란 딸 하나를 슬하에 두셨다. 홍이는 주로 서울에 살았기 때문에

연전에 타계할 때까지 서너 번 만난 게 고작이었고, 따님인

자명이는 하와이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다.

 

둘째 아들 성이는 항렬로 따지면 나 보다 높았지만 그런 것 모두

무시하고 우리 집엘 자주 들락거렸다. 성이는 아버지인 ‘구상 시인’ 보다

한 수 더 앞지르는 걸물이었고 그는 가진 것 없는 부자였으며

한마디로 바람 불지 않는 날 언덕에 올라 바람을 불러오는 ‘바람 바람

바람’이었다. 성이는 부전자전이 아니랄까봐 시인처럼 폐가 나빴다.

그래도 그는 타는 목마름처럼 끓어오르는 뜨거운 피의 기운을 참지 못했다.

 

약을 먹고 건강이 겨우 회복되는 기미가 보이면 술을

마셨고, 다시 나빠지면 약을 먹고, 이렇게 반복하다 보니 약에

내성이 생겨 나중에는 아무 약도 듣지 않았다. 이를 보다 못한

중광 스님은 당신이 그린 선화 54점을 항구에게 건네주면서

“이 걸 팔아서 성이를 요양소에 보낼 경비로 사용하라”고 일렀다.

성이는 ‘걸레 스님 중광전’의 수입을 치료비로

챙겨 인천에 있는 결핵요양소에 입원하기로 결정한 후 잠시

대구로 내려왔다. “이거 우리 집에 있는 책갈피에서 찾은 건데 이중섭

화백이 공초 오상순 시인을 그린 스케칩니다. 나는 요양소로

들어가면 살아나올지 죽어나올지 모르는데 마지막 선물로 받으세요.”

성이는 어느 신문 소설의 삽화로 사용한 흔적이 뚜렷한 어린 아이

손바닥 크기의 펜화 한점을 내 손에 쥐어주고 서울로 떠났다.

 

그러고는 살아서 만나지 못했으니 그 게 성이와는 이승의

마지막이었다. 시인은 아내와 아들 둘을 먼저 가슴에 묻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 고요와 적막이 바다를 이루는 곳에 살면서도 한번도

외롭고 쓸쓸한 표정을 짓지 않으셨다. 뵈올 때마다 온화한 미소,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한 음계 낮춰 말씀하시는 품이

가을 속으로 떠날 사람 같아 보였다.



시인은 맏아들 홍이가 하늘나라로 떠난 뒤에도 여러 번

대구 나들이를 하셨다. 중광 스님의 ‘매드 몽크전’이 동아쇼핑에

열렸을 때도 김종규 선생(박물관협회장)과 함께 하객으로 오셨다.

그리고 여류 서양화가 김종복 화백의 대형 전시회가

서울신문 화랑에서 열렸을 때도 지팡이를 짚고 나오셔서 축사를

하시기도 했다. 시인은 자신의 몸이 불편하실 터인데도

대구서 올라 온 손자녀석의 밥 걱정과 아울러 누구와 술을 마실

것인지 그런 것 까지 걱정해 주셨다. 마침 시인의 옆에

있던 서울의 양아들 남정도 형(한경화학 사장)이 “아버지, 활이가

갈 집을 미리 예약해 두었습니다”라고 말씀드리자

그냥 고개를 끄덕이셨다.

 

시인은 자신이 앞장서 걸을 수 없는 건강을 탓하며

아마 가슴을 쳤으리라. 시인은 투병 중에 그동안 아껴두었던 2억원을

장애인들을 위해 쾌척했으며 이중섭 화백이 시인에게 그려준

‘구상 가족’이란 유화를 판 돈 1억원도 아무도 모르게 이웃을 위해

몽땅 기부했다. 그러면서도 죽는 날 까지 자신에게는

엄격할 정도로 검소한 삶을 살았으며 만년에는 이런 시를 썼다.

 


‘흐려진 내 눈으로 보아도 내 마음은

아직도 명리에 연연할 뿐만 아니라

음란의 불씨도 어느 구석에 남아 있고

늙음과 병약과 무사를 핑계로 삼아

태만과 안일과 허위에 차 있다

‘근황’ 中



시인은 2004년 5월 11일 몸은 여의도 성모병원

중환자실에 뉘여 둔 채 영혼은 아내와 아들 둘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나라로 올라 가셨다. 영결식장에는 시인의 정을 그리워하는

문인묵객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 후 49제

추모 미사가 열린 여의도 성당에도 진심으로 시인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승에서의 아름다웠던 삶이 천국에서도

그렇게 이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나는 그 날 추모 미사를 드리는 동안 성모 마리아상 옆으로

피어오르는 시인의 봄 아지랑이 같은 미소와 낮게 흔들리는 말씀

그 말씀 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도 그리고 들리지도 않았다.

나도 가을 속으로 떠나고 싶었다. 그러고 몇 달 뒤 혼절에서 깨어난

듯한 시인의 따님 자명이에게서 한 장의 소식이 왔다.

“아버님 영정 사진 몇 장을 좀 크게 뽑았습니다. 가족 개념에

드는 분들에게 나눠드리려고요. 그리고 모자를 좋아 하시는 것 같아

아버님 생전에 즐겨 쓰시던 모자 하나를 유품 중에서 골라 챙겨

두었습니다. 대구에 갈 때 갖고 가겠습니다. 자명 올림”

시인은 떠나고 모자만 내 곁으로 왔다. 그것은 마치 히말라야 등반

중에 설산에 묻혀 돌아오지 못하는 산악인의 유품

한 점을 받아 든 그런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