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폴의 강 36 / 구 상 내가 이 강에다 종이배 처럼 띄워보내는 이 그리움과 염원은 그 어디서고 만날 것이다 그 어느 때이고 이뤄질 것이다 저 망망한 바다 한복판일는지 저 허허한 하늘 속일는지 다시 이 지구로 돌아와 설는지 그 신령한 조화 속이사 알 바 없으나 생명의 영원한 동산 속의 불변하는 한 모습이 되어 내가 이 강에다 종이배처럼 띄워보내는 이 그리움과 염원은 그 어디서고 만날 것이다 그 어느 때고 이뤄질 것이다 읽고 싶은 시 2024.01.27
눈 내리는 길로 오라 / 홍윤숙 눈 내리는 길로 오라 눈을 맞으며 오라 눈 속에 눈처럼 하얗게 얼어서 오라 얼어서 오는 너를 먼 길에서 맞으면 어쩔까 나는 향기로이 타오르는 눈 속의 청솔가지 스무 살 적 미열로 물드는 귀를 한 자쯤 눈 쌓이고, 쌓인 눈밭에 아름드리 해 뜨는 진솔길로 오라 눈 위에 눈 같이 쌓인 해를 밞고 오라 해 속에 박힌 까만 꽃씨처럼 오는 너를 맞으면 어쩔까 나는 아질아질 붉어지는 눈밭의 진달래 석 달 열흘 숨겨온 말도 울컥 터지고 오다가다 어디선가 만날 것 같은 설레는 눈길 위에 자라 온 꿈 삼십 년 그 거리에 바람은 청청히 젊기만 하고 눈발은 따뜻이 쌓이기만 하고 읽고 싶은 시 2024.01.24
자존심에 대한 후회 / 정호승 나에겐 버릴 수 있는 자존심이 너무 많은 게 탈이었다 돈과 혁명 앞에서는 가장 먼저 가장 큰 자존심을 버려야했다 버릴 수 없으면 죽이기라도 해야 내가 사는 줄 알았다 칼을 들고 내 자존심의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 자객처럼 자존심의 심장에 칼을 꽂아도 자존심은 늘 웃으면서 산불처럼 되살아났다 어떤 자존심도 도끼로 뿌리까지 내리찍어도 산에 들에 나뭇가지처럼 파랗게 싹이 돋았다 버릴 수 있는 자존심이 너무 많아서 슬펐던 나의 일생은 이미 눈물로 다 지나가고 이제 마지막 하나 남은 죽음의 자존심은 노모처럼 성실히 섬겨야한다 자존심에도 눈이 내리고 꽃이 피는지 겨울새들이 찾아와 맛있게 먹고 가는 산수유 붉은 열매가 달려 있다 읽고 싶은 시 2024.01.22
돈오의 꽃 / 도종환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비 오고 바람 분다 연꽃 들고 미소짓지 말아라 연꽃 든 손 너머 허공을 보지 못하면 아직 무명이다 버리고 죽어서 허공 된 뒤에 큰 허공과 만나야 비로소 우주이다 백 번 천 번 다시 죽어라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매일 별똥이 지고 어둠 몰려올 것이다 읽고 싶은 시 2024.01.21
겨울 언덕 / 김연동 詩 황덕식 曲 . Ten 안형렬 갈꽃 진 겨울 언덕 바람이 불다 갔다 황혼이 쓸린 그 자리 어둠이 짙어오고 박토의 가슴 위에는 흰눈만이 내린다 가슴을 풀 섶에 놓아 이슬방울 받고 싶은 풀무치 울음 타던 계절도 지나고 우리는 무엇에 젖어 이날들을 울 것인가 눈 덮인 겨울 언덕 낙엽이 흩날린다 별빛이 부서진 자리 찬 서리 가득하고 메마른 가슴 위에는 겨울비가 내린다 푸르른날 그리워지는 이 계절 지나가면 꽃 피고 새가 우는 싱그런 하늘 밑에 우리는 풀잎에 젖어 지난날을 노래하리 듣고 싶은 가곡 2024.01.15
겨울 길을 간다 / 이해인 봄, 여름 데리고 호화롭던 숲 가을과 함께 서서히 옷을 벗으며 텅 빈 해질녁에 겨울이 오는 소리 문득 창을 열면 흰 눈 덮인 오솔길 어둠은 더욱 깊고 아는 이 하나 없다 별 없는 겨울 숲을 혼자서 가니 먼 길에 목마른 가난의 행복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겨울 숲 길을 간다. 읽고 싶은 시 2024.01.13
무소부재(無所不在) / 구 상 아지랑이 낀 연당(蓮塘)에 꿈나무 살포시 내려앉듯 그 고요로 계십니까. 비 나리는 무주공산(無主空山) 어둑이 진 유수(幽遂) 속에 심오하게 계십니까. 산사(山寺) 뜰 파초(芭草) 그늘에 한 포기 채송화모양 애련(哀憐)스레 계십니까. 휘엉청 걸린 달 아래 장독대가 지은 그림자이듯 쓸쓸하게 계십니까. 청산(靑山)이 연장(連嶂)하여 병풍처럼 둘렀는데 높이 솟은 설봉(雪峰)인 듯 어느 절정에 계십니까. 일월(日月)을 조응(照應)하여 세월없이 흐르는 장강(長江)이듯 유연(悠然)하게 계십니까. 상강(霜降) 아침 나목(裸木) 가지에 펼쳐있는 청열(淸烈) 안에 계십니까. 석양이 비낀 황금 들판에 넘실거리는 풍요 속에 계십니까. 삼동(三冬)에 뒤져놓은 번열(煩熱) 식은 대지같이 태초의 침묵을 안고 계십니까. 허허창창(虛.. 읽고 싶은 시 2024.01.12
산이 날 에워싸고 /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팍에 호박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읽고 싶은 시 2024.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