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4090

적도를 돌고 온 술 / 윤소천

​ 가을이 깊어간다. 벼는 한여름이글거리는 땡볕에 폭우와 태풍을 이겨내고 따가운 가을 햇살에 익어 열매를 맺는다. 황금들녘에 고개 숙인 벼들을 보고 있으면 세상을 달관한 성인의 겸양을 보는듯하다. 사람은 육십이 넘으면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포도주처럼 익어간다고 한다. 우리 삶도 꽃이 피고 지면서 열매를 맺고 시련 속에 익어가면서새롭게 태어난다. 나는 얼마 전 적도를 두 번 돌고 오는 여정에서 만들어지는 술이 있다는 말을 듣고 한 번 맛보고 싶었다. 바이킹의 후예가 만든 노르웨이의 리니아아쿠아비트LinieAquavit라는 술인데, 오크통에 담겨 적도Linie를 돌아오는 항해를 통해 숙성된다. 술병에는 노르웨이의 지도와배가 그려져 있고 그때그때의 항로가 표시되어 있는데, 바다의 기상 상태에 따라 술맛이 ..

소천의 수필 2024.02.26

새 해 / 구 상

내가 새로와 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내가 새로와져서 인사를 하면 이웃도 새로와진 얼굴을 하고 지난날의 쓰라림과 괴로움은 오늘의 쓰라림과 괴로움이 아니요 내일도 기쁨과 슬픔이 수놓겠지만 그것은 율조(律調)일 따름이다 흰 눈같이 맑아진 내 의식(意識)은 이성(理性)의 햇발을 받아 번쩍이고 내 심호흡(深呼吸)한 가슴엔 사랑이 뜨거운 새 피로 용솟음 친다 꿈은 나의 충직(忠直)과 일치(一致)하여 나의 줄기찬 노동은 고독을 쫓고 하늘을 우러러 소박한 믿음을 가져 기도(祈禱)는 나의 일과(日課)의 처음과 끝이다 이제 새로운 내가 서슴없이 맞는 새해 나의 생애(生涯), 최고의 성실로써 꽃피울 새해여 !

읽고 싶은 시 2024.02.12

두 그루 은행나무 / 홍윤숙

두 그루 은행나무가 그 집 앞에 서 있습니다 때가오니 한 그루는 순순히 물들어 황홀하게 지는 날 기다리는데 또 한 그루는 물들 기색도 없이 퍼렇게 서슬 진 미련 고집하고 있습니다 점잖게 물들어 순하게 지는 나무는 마음 조신함에 그윽해 보이고 퍼렇게 잘려 아니다 아니다 떼를 쓰는 나무는 그 미련하게 옹이 진 마음 알 수는 있지만 왠지 일찍 물든 나무는 일찍 물리를 깨달은 현자처럼 그윽해 보이는데 혼자 물들지 못하고 찬바람에 떨고 섰는 나무는 철이 덜든 아이처럼 딱해 보입니다 아마도 그 집 주인을 닮았나 봅니다 날마다 두 그루의 나무가 마주 서서 서로 다른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그 집 앞 가을이 올해도 깊어 갑니다

읽고 싶은 시 2024.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