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늦은 꽃 / 도종환

윤소천 2014. 4. 22. 08:17

 

 

 

            

                

 

 꽃은 더디 피고 잎은 일찍 지는 산골에서 여러 해를 살았지요

길어지는 나무들의 동안거를 지켜보며 나도 묵언한채 마당이나 쓸었지요

내 이십대와 그 이후의 나무들도 늦되는 것이 얼마나 많았던지요

 

 늦게 피는 내게 눈길 주는 이 없고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낙화는 빨리 와 꽃잎 비에 젖어 흩어지며 서른으로 가는 가을은

하루하루가 스산한 바람이었지요 내 마음의 꽃잎들도 젖어

딩굴며 나를 견디기 힘들어했지요

 

 이 산을 떠나는 날에도 꽃은 더디 피고 잎은 먼저 지겠지요

기다리던 세월은 더디 오고 찬란한 순간은 일찍 지평에서 사라지곤

했으니 내 남은 생의 겨울도 눈 내리고 서둘러 빙판 지겠지요

 

 그러나 이 산에 내 그림자 없고 바람만 가득한 날에도

기억해주세요 늦게 피었어도 그 짧은 날들이 다 꽃 피는 날이

있다고 일찍 잎은 지고 그 뒤로 오래 적막했어도

함께 있던 날들은 눈부신 날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