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744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신 / 도종환

청년시절 나는 공산주의의 이상에 빠졌습니다 젊은 나에게 정의와 평등은 거역할 수 없는 가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모형을 사회에 강제로 도입하기 위해 인간적 가치들을 버려야 한다면 그것 또한 폭력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데 내 생애 전체가 걸렸습니다 내가 자유의 복구를 시작하였지만 이 이데올로기 공백을 자본의 물결로 덮어버리는 걸 찬성하진 않습니다 자유도 사람과 자연과 사회의 원리와 통합하면서 착실하게 길 밞아나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 민중은 영감도 잃고 지도자도 잃고 변화에 참여할 마당도 잃었습니다 어려운 시대에 나는 농부였던 우리 부모가 내게 물려준 상식을 잊지 않았습니다 상식은 균형과 절제에 대한 감각이기도 합니다 흙에 대한 애정은 내게 굴하지 않는 정신과 지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소박함과 겸손함, 함께 노..

읽고 싶은 시 2014.03.27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읽고 싶은 시 2014.03.26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 황동규

내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은 꽃꽂이도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그냥 설거지일 뿐. 얼굴 붉은 사과 두알 식탁에 얌전히 앉혀두고 간장병과 기름병을 치우고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마음보다 더 시원하게, 접시와 컵, 수저와 잔들을 프라이팬을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하게 씻는 것. 겨울 비 잠시 그친 틈을 타 바다 쪽을 향해 우윳빛 창 조금 열어놓고, 우리 모르는 새 언덕 새파래지고 우리 모르는 새 저 샛노란 유채꽃 땅의 가슴 간지르기 시작했음을 알아내는 것, 이국異國 햇빛 속에서 겁 없이.

읽고 싶은 시 2014.03.24

사리(舍利) / 신달자

누구나 자신의 몸에 두 개쯤의 사리를 가지고 있다 태어나 처음으로 세상을 보던 순간에서 열두 대문을 열고 다시 열두 계곡을 휘돌아 다시 일천 대문을 밀며 더 깊어지는 눈(眼) 어쩌다 발 헛디뎌 으윽 허리가 꺽일 때 어둠 속에서 더 번뜩이는 빛으로 남아 있던 눈 태우면 태워져 사라지는 사리도 있는 것이다 쨍그랑 소리 한 번 없이 사라지는 사리도 있는 것이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있는 몸의 열매 그것은 사라지면서 별에 포개질 것이다 늙은 사람들의 눈을 보라 절벽에 떨어진 듯 쭈글쭈글한 주름이 싸고 있는 눈 쭈그러진 주름 안에 나무 관세음이 있다 세상사 두루 본 생의 이력으로도 그 눈은 사리가 되리 태우면 태워져 사라지면서 온 세상을 밝히는 사리도 있는 것이다

읽고 싶은 시 2014.03.21

해인으로 가는 길 / 도종환

화엄을 나섰으나 아직 해인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해인으로 가는 길에 물소리 좋아 숲 아랫길로 들었더니 나뭇잎 소리 바람 소리다 그래도 신을 벗고 바람이 나뭇잎과 쌓은 중중연기 그 질긴 업을 풀었다 맺었다 하는 소리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다 지난 몇 십 년 화엄의 마당에서 나무들과 함께 숲을 이루며 한 세월 벅차고 즐거웠으나 심신에 병이 들어 쫓기듯 해인을 찾아 간다 애초에 해인에서 출발하였으니 돌아가는 길이 낯설지는 않다 해인에서 거두어 주시어 풍랑이 가라앉고 경계에 걸리지 않아 무장무애하게 되면 다시 화엄의 숲으로 올 것이다 그땐 화엄과 해인이 지척일 것이다 아니 본래 화엄으로 휘몰아치기 직전이 해인이다 가라앉고 가라앉아 거기 미래의 나까지 바닷물에 다 비친 다음에야 해인이다 그러나 나는 해인에도 이르지..

읽고 싶은 시 2014.03.19

저녁 무렵 / 도종환

열정이 식은 뒤에도 사랑해야 하는 날들은 있다 벅찬 감동 사라진 뒤에도 부둥켜안고 가야 할 사람이 있다 끓어오르던 체온을 식히며 고요히 눈감기 시작하는 저녁하늘로 쓸쓸히 날아가는 트럼펫 소리 사라진 것들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풀이란 풀 다 시들고 잎이란 잎 다 진 뒤에도 떠나야 할 길이 있고 이정표 잃은 뒤에도 찾아가야 할 땅이 있다 뜨겁던 날들은 다시 오지 않겠지만 거기서부터 또 시작해야 할 사랑이 있다

읽고 싶은 시 2014.03.10

신발정리 / 정호승

당신 떠난 지 언제인데 아직 신발 정리를 못했구나 창 너머 개나리는 또 피는데 당신이 신고 가리라 믿었던 신발만 남아 오늘은 식구들과 강가에 나가 당신의 모든 신발을 태운다 당신이 돌아다닌 길을 모두 태운다 푸른 강물의 물결 위로 신발 타는 검은 연기가 잠시 머무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그날 당신이 떠나던 날 당신을 만나러 조문객들이 자꾸 몰려오던 날 나는 문간에서 이리저리 흩어지고 뒤집힌 그들의 구두를 정리했다 이제 산 자의 신발을 정리하는 일과 죽은 자의 신발을 정리하는 일이 무엇이 다르랴

읽고 싶은 시 2014.03.08

정서진(正西津) / 정호승

벗이여 지지 않고 어찌 해가 떠오를 수 있겠는가 지지 않고 어찌 해가 눈부실 수 있겠는가 해가 지는 것은 해가 뜨는 것이다 낙엽이 지지 않으면 봄이 오지 않듯이 해는 지지 않으면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 벗이여 눈물을 그치고 정서진으로 오라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정히 노을 지는 정서진의 붉은 수평선을 바라보라 해넘이가 없이 어찌 해돋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해가 지지 않고 어찌 별들이 빛날 수 있겠는가 오늘 우리들 인생의 이 적멸의 순간 해는 지기 때문에 아름답고 찬란하다 해는 지기 때문에 영원하다

읽고 싶은 시 2014.03.07

무인등대 / 정호승

등대는 바다가 아니다 등대는 바다를 밝힐 뿐 바다가 되어야 하는 이는 당신이다 오늘도 당신은 멀리 배를 타고 나아가 그만 바다에 길을 빠뜨린다 길을 빠뜨린 지점을 뱃전에다 새기고 돌아와 결국 길을 찾지 못하고 어두운 방파제 끝 무인등대의 가슴에 기대어 운다 울지 마라 등대는 길이 아니다 등대는 길 잃은 길을 밝힐 뿐 길이 되어야 하는 이는 오직 당신이다

읽고 싶은 시 2014.03.05

너를 위한 노래 5 / 신달자

한 발자국만 가면 수심 깊은 강 이쯤에서 너의 이름을 부른다. 바람이 지나온 세월을 찢고 있다 아직은 다 죽지 못해서 내 피 섞인 시간들 울부짖으며 뜯기며 넝마가 되네. 바람은 내 충직한 하수인 흉물스러운 모습들 내 등 뒤로 날라 보냈는지 경건히 남은 목숨을 내어 놓고 수심 깊은 강에 먼저 마음이 걸어가는 고요한 명목의 시간 바람도 나와 같이 무릎 꿇는다. 하늘의 초승달 은빛 칼처럼 내려다본다. 내 무엇을 숨길 수 있으랴 어디를 간 들 바람을 피하며 혹은 하늘의 시선을 거스를 수 있느냐 내 이미 수심 깊은 강에 들어섰으니 그대여 나는 너의 이름을 부를 뿐.

읽고 싶은 시 2014.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