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에게 /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내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읽고 싶은 시 2014.02.27
달 밤 / 황동규 누가 와서 나를 부른다면 내 보여주리라 저 얼은 들판 위에 내리는 달빛을. 얼은 들판을 걸어가는 한 그림자를 지금까지 내 생각해 온 것은 모두 무엇인가. 친구 몇몇 친구 몇몇 그들에게는 이제 내 것 가운데 그중 외로움이 아닌 길을 보여주게 되리. 오랫동안 네 여며온 고의춤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두 팔 들고 얼음을 밞으며 갑자기 구름 개인 들판을 걸어갈 때 헐벗은 옷 가득히 받는 달빛 달빛. 읽고 싶은 시 2014.02.25
눈 / 황동규 오 눈이로군. 그리고 가만히 다닌 길이로군. 입김 뒤에 희고 고요한 아침 잠깐잠깐의 고요한 부재不在 오 눈이로군. 어떤 돌아옴의 언저리 어떤 낮은 하늘의 빛 한 점 빛을 가진 죽음이 되기 위하여 나는 꿈꾼다, 꿈꾼다, 눈빛 가까이 한 가리운 얼굴을, 한 차고 밝은 보행을. 읽고 싶은 시 2014.02.24
겨울밤 노래 / 황동규 조금이라도 남은 기쁨은 버리지 못하던 해 지는 언덕을 오를 때면 서로 잡고 웃던 해서 눈물겹던 사내여 오라. 우리 같이 흰 흙을 핥던 오후에는 배가 안 고프고 언덕에서 내려뵈던 깊은 황혼 캄캄하게 그 황혼 속을 달려가던 사내여 오라. 겨울날 빈터에 몰려오는 바람소리 그 밑에 엎드려 얼음으로 목을 축이고 얼어붙은 못 가에 등을 들판으로 돌리고 서서 못 속에 있는 우리의 마음을 바라 볼 때 몸과 함께 울던 우리의 옷을 보라.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손 그 떨리는 손에는 네 목을 잡고 머리칼 날리며 빙판에 서서 서로 마주 보며 네 목을 잡고 내 들려주리 쓰러지지 않았던 쓰러지지 않았던 사내의 웃음을. 어둡다 말하면 대답소리 들리는 쇳날을 만지면 살이 떨어지는 그런 떨리는 노래는 이제 우리에게. 서로 붙잡은 우.. 읽고 싶은 시 2014.02.23
간디에게 / 정호승 나는 그대의 소금으로 만든 김치를 먹고 산다 나는 그대의 소금을 넣고 끓인 국밥을 먹고 산다 나는 그대의 소금으로 만든 주먹밥을 들고 길을 떠난다 조국의 운명을 만들다가 끝끝내 조국의 운명이 되고 만 그대의 길가에 단식을 끝내고 노란 산나리꽃 한 송이 피었다 진다 읽고 싶은 시 2014.02.22
가보지 않은 길 앞에서 / 홍윤숙 우리는 왜 가보지 않은 길 앞에 서면 마음 설렐까 그 길에 뜨는 해는 무엇이 다른가 큰 숲에 이르는 작은 숲이 있고 숲길 사이로 냇물 흐르고 냇물 건너 마을엔 어진 사람들 모여 살 것 같은 따뜻한 화덕에 활활 불 피워놓고 낯선 나그네들 융숭히 맞이할 것 같은 그 길 위에 하나의 세계가 다가오고 다가와 눈부신 아침을 열고 해와 달 별들이 새로운 날을 열 것 같은 악보처럼 늘어선 나무들이 어린 풀들 무릎에 안고 춤추는 길 실바람 머리칼 나부끼며 누구나 한번은 가보지 못한 길 위에 서서 세상을 여는 또하나의 열쇠를 가슴 두근거리며 두 손에 쥐어본다 그러나 열쇠는 이윽고 녹이 슬고 그 길도 지나온 길과 다를 것 없음을 희망과 실망은 언제나 손등과 손바닥 같은 허망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읽고 싶은 시 2014.02.17
홍매화 / 도종환 눈 내리고 내려 쌓여 소백산자락 덮어도 매화 한 송이 그 속에서 핀다 나뭇가지 얼고 또 얼어 외로움으로 반질반질해져도 꽃봉오리 솟는다 어이하랴 덮어버릴 수 없는 꽃 같은 그대 그리움 그대 만날 수 있는 날 아득히 멀고 폭설은 퍼붓는데 숨길 수 없는 숨길 수 없는 가슴 속 홍매화 한 송이 읽고 싶은 시 2014.02.16
차나 한잔 / 정호승 입을 없애고 차나 한잔 들어라 눈을 없애고 찻잔에서 우러난 작은 새 한 마리 하늘 높이 날아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라 지금까지 곡우를 몇십년 자나는 동안 찻잎 한번 따본 적 없고 지금까지 우전을 몇 천년 만드는 동안 찻물 한번 끓여본 적 없으니 손을 없애고 외로운 차나 한잔 들어라 발을 없애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 첫눈 내리기를 기다려라 마침내 귀를 없애고 지상에 내리는 마지막 첫눈 소리를 듣다가 홀로 잠들어라 읽고 싶은 시 2014.02.15
눈을 감고 / 홍윤숙 언제부터인가 나는 눈을 감고 밥을 먹는다 눈을 감고 세상을 보고 눈을 감으면 씹는 밥알 한 알의 맛이 더 깊어지고 현란하게 채색된 세상이 한 장 수묵빛 그림이 되고 그 그림 위로 소슬한 바람 불어 하얗게 지워진다 눈을 감으면 떠돌던 내가 내안에 들어오고 온 세상 소요도 잠잠히 잦아들고 내 안의 물결치던 크고 작은 이랑들이 하나로 모여 허공을 만들고 출렁이던 가슴 서서히 가라앉고 텅 빈 허공이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늑해진다 아직 내가 이곳에 살이 있음이 눈부시고 죽음 같은 고독이 꽃잎인 양 향기로워진다 눈을 감는 것은 내가 살아있음을 더욱 깊이 확인하고 깨닫고 사랑하기 위해서다 눈을 감는 것은...... 읽고 싶은 시 2014.02.12
꽃다지 / 도종환 바람 한 줄기에도 살이 떨리는 이 하늘 아래 오직 나 혼자뿐이라고 내가 이 세상에 나왔을 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처음 돋는 풀 한 포기보다 소중히 여겨지지 않고 민들레만큼도 화려하지 못하여 나는 흙바람 속에 조용히 내 몸을 접어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안 뒤부터는 지나가는 당신의 그림자에 몸을 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했고 건넛산 언덕에 살구꽃들이 당신을 향해 피는 것까지도 즐거워했습니다 내 마음은 이제 열을 지어 보아주지 않는 당신 가까이 왔습니다 당신이 결코 마르지 않는 샘물로 흘러오리라 믿으며 다만 내가 당신의 무엇이 될까만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당신에게 이름이 없는 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너무도 가까이 계심을 고마워하는 당신으로 인해 피어있는 꽃입니다 읽고 싶은 시 2014.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