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결심 / 이해인 어떤 결심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아플 때 한 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을 안 하기로 했다 고요히 나 자신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 만치서 행복이 .. 읽고 싶은 시 2018.01.15
그는 / 정호승 그는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 읽고 싶은 시 2018.01.09
내 나이 가을에서야 / 이해인 내 나이 가을에서야 젊었을 적 내 향기 너무 짙어서 남의 향기를 맡을 줄 몰랐습니다 내 밥그릇이 가득차서 남의 밥그릇이 빈 줄을 몰랐습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고 사랑에 갈한 마음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세월이 지나 퇴색의 계절 반짝 반짝 윤이나고 풍성했던 나의 가진 것들이 바래고 .. 읽고 싶은 시 2018.01.01
구유 앞에서 / 이해인 구유 앞에서 하늘에서 땅까지 참으로 먼 길을 걸어 내려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엄청난 거리를 사랑으로 좁히려 오셨습니다 예수 아기시여 마리아의 몸 속에 침묵하는 말씀으로 당신이 잉태되셨을 때 인류의 희망과 기다림도 잉태되었습니다 당신이 마리아의 태중.. 읽고 싶은 시 2017.12.28
겨울나무 / 이해인 흰 눈 내리는 날 밤새 깨어 있던 겨울나무 한 그루 창을 열고 들어와 내게 말하네 맑게 살려면 가끔은 울어야 하지만 외롭다는 말은 함부로 내뱉지 말라고 사랑하는 일에도 자주 마음이 닫히고 꽁해지는 나에게 나보다 나이 많은 나무가 또 말하네 하늘을 보려면 마음을 넓혀야지 별을 보려면 희망도 높여야지 이름 없는 슬픔의 병으로 퉁퉁 부어 있는 나에게 어느새 연인이 된 나무는 자기도 춥고 아프면서 나를 위로하네 흰 눈 속에 내 죄를 묻고 모든 것을 용서해 주겠다고 나의 나무는 또 말하네 참을성이 너무 많아 나를 주눅들게 하는 겨울나무 한 그루 읽고 싶은 시 2017.12.18
사랑의 침묵 / 도종환 꽃들에게 내 아픔 숨기고 싶네 내 슬픔 알게 되면 꽃들도 울 테니까 얼음이 녹고 다시 봄은 찾아와 강물이 내게 부드럽게 말 걸어올 때도 내 슬픔 강물에게 말하지 않겠네 강물이 듣고 나면 나보다 더 아파하며 눈물로 온 들을 적시며 갈 테니까 겨울이 끝나고 북서풍 물러갈 무렵엔 우리 사랑 끝나야 하는 이유를 나는 바람에게도 말하지 않겠네 이제 막 눈을 뜨는 햇살에게도 삶이 왜 괴로움인지 말하지 않겠네 이제 막 눈을 뜨는 햇살에게도 삶이 왜 괴로움인지 말하지 않겠네 새 떼들이 돌아오고 들꽃 잠에서 깨어나도 아직은 아직은 말하지 않겠네 떠나는 사람 붙잡을 수 없는 진짜 이유를 꽃들이 듣고 나면 나보다 더 슬퍼하며 아름다운 꽃잎 일찍 떨구고 말 테니까 읽고 싶은 시 2017.12.10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 유치환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고독은 욕되지 않으나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토록 요조(窈窕)피던 빛갈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간 기술사(奇術師)의 모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寒天) 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진.. 읽고 싶은 시 2017.12.04
가을 저녁 / 이해인 가을 저녁 박하 내음의 정결한 고독의 집 연기가 피네 당신 생각 하나에 안방을 비질하다 한 장의 홍엽(紅葉)으로 내가 물든 가을 저녁 낡고 정든 신도 벗고 떠나고 싶네 읽고 싶은 시 2017.12.04
자화상 / 유안진 한 오십년 살고보니 나는 나는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라 눈과 서리와 비와 이슬이 강물과 바닷물이 뉘기 아닌 바로 나였음을 알아라 수리부엉이 우는 이 겨울도 한밤중 뒷뜰 언 밭을 말달리는 눈바람에 마음 헹구는 바람의 연인 가슴속 용광로에 불지피는 황홀한 거짓말을 오오 미처볼 뿐 대책없는 불쌍한 희망을 내 몫으로 오늘 몫으로 사랑하여 흐르는 일 삭아질수록 새우젓갈 맛나듯이 때얼룩에 쩔을수록 인생다워지듯이 산다는 것도 사랑한다는 것도 때묻히고 더럽혀지며 진실보다 허상에 더 감동하며 정직보다 죄업에 더 집착하며 어디론가 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다 나란히 누웠어도 서로 다른 꿈을 꾸며 끊임없이 떠나고 떠도는 것이다 멀리 멀리 떠나 갈수록 가슴이 그득히 채워지는 것이다 갈 데까지 갔다가는 돌아오는 것이다 하늘.. 읽고 싶은 시 2017.11.26
가을엔 / 조병화 가을엔 가을엔 우리 고개 숙입시다. 맑게 비워낸 경건한 마음으로 가을엔 우리 서로 고개 숙입시다. 높아가는 가을하늘이 두고 가는 이 무거운 사랑. 그 무거운 사랑을 이어받아 고운 마음으로, 고운마음으로 깊이 간직하면서 그 소중함을 가득히 가을엔 우리 서로 고개 숙입시다. 기도와.. 읽고 싶은 시 2017.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