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림 자 / 정호승 그 림 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그림자가 한 마리 새의 그림자가 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그림자가 한 그루 나무의 그림자가 될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그림자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손의 그림자가 될 때가 있습니다 ] 그런 사람들은 먼 길을 가는 동안 평생 .. 읽고 싶은 시 2018.11.13
가을 햇볕에 / 김남조 가을 햇볕에 보고 싶은 너 가을 햇볕에 이 마음 익어서 음악이 되네 말은 없이 그리움 영글어서 가지도 휘이는 열매, 참다 못해 가슴 찢고 나오는 비둘기떼 들 들꽃이 되고 바람 속에 몸을 푸는 갈숲도 되네 가을 햇볕에 눈물도 말려야지 가을 햇볕에 더욱 나는 사랑하고 있건만 말은 없이.. 읽고 싶은 시 2018.10.24
묵 사 발 / 정호승 묵 사 발 나는 묵사발이 된 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첫눈 내린 겨울산을 홀로 내려와 막걸리 한잔에 도토리묵을 먹으며 묵사발이 되어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묵사발이 있어야 묵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비로소 나를 묵사발로 만든 이에게 감사하기로 했다 나.. 읽고 싶은 시 2018.10.14
폐지 / 정호승 폐 지 어느 산 밑 허물어진 폐지 더미에 비 내린다 폐지에 적힌 수많은 글씨들 폭우에 젖어 사라진다 그러나 오직 단 하나 사랑이라는 글씨만은 모두 비에 젖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다 읽고 싶은 시 2018.10.08
먼산 / 오세영 먼 산 새날이다. 어제는 목련이 피어서 새날이고 오늘은 진달래가 져서 새날이다. 새해다. 작년에는 눈이 침침해서 새해고 올해는 눈이 어두워서 새해다. 들꽃들이 내쏟는 향기가 예년보다 더 강한 탓이었을까. 매년 겪는 알레르기성 비염이지만 올해의 비염은 유난히도 기침이 잦다. 콜.. 읽고 싶은 시 2018.09.30
풀잎의 기도 / 도종환 풀잎의 기도 기도를 못하는 날이 길어지자 풀잎들이 대신 기도를 하였다 나 대신 고해를 하는 풀잎의 허리 위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던 바람은 낮은 음으로 성가를 불러주었고 바람의 성가를 따라 부르던 느티나무 성가대의 화음에 눈을 감고 가만히 동참하였을 뿐 주일에도 성당에 .. 읽고 싶은 시 2018.09.20
산다는 것 / 박경리 산다는 것 체하면 바늘로 손톱 밑 찔러서 피 내고 감기 들면 바쁜 듯이 뜰 안을 왔다 갔다 상처 나면 소독하고 밴드 하나 붙이고 정말 병원에는 가기 싫었다 약도 죽어라고 안 먹었다 인명재천 나를 달래는데 그보다 생광스런 말이 또 어디 있을까 팔십이 가까워지고 어느 날 부터 아침마.. 읽고 싶은 시 2018.09.10
멀리 가는 물 ... / 도종환 멀리 가는 물 ... 어떤 강물이든 처음엔 맑은 마음 가벼운 걸음으로 산골짝을 나선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물줄기는 그러나 세상 속을 지나면서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미 더렵혀진 물이나 썩을 대로 썩은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 세상 그런 여러 물과 만나.. 읽고 싶은 시 2018.08.17
탕 자 / 오세영 탕 자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날은 저물고, 인적은 끊기고 물결은 무심히 철썩이는데 아득히 반짝이는 강 건너 등불, 여어이, 여어이, 부르는 목소리는 쉬어 있는데, 강둑엔 메아리만 돌아오는데 어느 별이 불렀을까. 푸드득 어둠 속을 날아가는 물새 한 마리.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하늘엔.. 읽고 싶은 시 2018.08.05
후 회 / 피천득 후 회 산길이 호젓다고 바래다 준 달 세워 놓고 문 닫기 어렵다 거늘 나비같이 비에 젖어 찾아온 그를 잘 가라 한 마디로 보내었느니 읽고 싶은 시 2018.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