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묵 사 발 / 정호승

윤소천 2018. 10. 14. 19:54


묵  사  발





나는 묵사발이 된 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첫눈 내린 겨울산을 홀로 내려와

막걸리 한잔에 도토리묵을 먹으며

묵사발이 되어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묵사발이 있어야 묵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비로소

나를 묵사발로 만든 이에게 감사하기로 했다


나는 묵을 만들 수 있는 내가 자랑스럽다

묵사발이 없었다면 묵은 온유의 형태를 잃었을 것이다

내가 묵사발이 되지 않았다면

나는 묵의 온화함과 부드러움을 결코 얻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 또한 순하고 연한 묵의

겸손의 미덕을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묵사발이 되었기 때문에 당신은 묵이 될 수 있었다

굴참나무에 어리던 햇살과 새소리가 묵이 될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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