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달팽이
언젠가 낙타의 등을 타고
고비로 가는 꿈을 꾸었다
사막의 웅덩이에서 빠져죽은 당나귀도 보았다
낙타는 당나귀에게 사막을 걷는 법을
가르쳐 준 적이 있었다
낙타에게도 트라우마가 있다면
실크로드의 낭떠러지에서 미끄러진 기억 뿐이다
평생 아랫목에 누워 잠을 잔 적이 없는
낙타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모래폭풍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여
오아시스로 가는 지름길을 찿아내는 것만이
그나마 서러운 존재로 화인을 찍을 것이다
어느 날, 낙타는
햇살에 멀미를 하면서도
신기루가 왜 허상인지를 맨발로
체험하고 싶은 달팽이를 만났다
모래꽃을 본 적이 없는 달팽이
대신 어린왕자와 사막여우와 어울리는 꿈을 꾸고 싶었다
달팽이는 눈 먼 세상을 더듬으며
바람의 언덕까지 혼자 올라갔다
그날 밤, 발길질하는 낙타의 발톱 위에서
언뜻 잠이 들었던가
그리고 눈물의 갑옷으로 지붕을 짓던 달팽이
별똥별 쏟아지는 사막에서 기적처럼 베푸는 소나기에
온 몸의 껍질을 벗는 꿈을 꾸었다
저기, 사막을 건너 피안의 저쪽,
오아시스로 가는 길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 달팽이,
낙타와 동행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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