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달팽이와 낙타 / 김효비아

윤소천 2022. 9. 7. 09:29

 

 

 

나, 달팽이

 

언젠가 낙타의 등을 타고

고비로 가는 꿈을 꾸었다

사막의 웅덩이에서 빠져죽은 당나귀도 보았다

낙타는 당나귀에게 사막을 걷는 법을

가르쳐 준 적이 있었다

낙타에게도 트라우마가 있다면

실크로드의 낭떠러지에서 미끄러진 기억 뿐이다

평생 아랫목에 누워 잠을 잔 적이 없는

낙타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모래폭풍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여

오아시스로 가는 지름길을 찿아내는 것만이

그나마 서러운 존재로 화인을 찍을 것이다

 

어느 날, 낙타는 

햇살에 멀미를 하면서도

신기루가 왜 허상인지를 맨발로

체험하고 싶은 달팽이를 만났다

 

모래꽃을 본 적이 없는 달팽이

대신 어린왕자와 사막여우와 어울리는 꿈을 꾸고 싶었다

달팽이는 눈 먼 세상을 더듬으며

바람의 언덕까지 혼자 올라갔다

그날 밤, 발길질하는 낙타의 발톱 위에서

언뜻 잠이 들었던가

 

그리고 눈물의 갑옷으로 지붕을 짓던 달팽이

별똥별 쏟아지는 사막에서 기적처럼 베푸는 소나기에

온 몸의 껍질을 벗는 꿈을 꾸었다

저기, 사막을 건너 피안의 저쪽,

오아시스로 가는 길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 달팽이,

낙타와 동행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