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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확/ 손광성

우리 집 마당에는 물을 담아 두는 돌확이 셋이 있다. 하나는 이집으로 이사 올 때 전 주인에게서 헐값에 물려받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사동에서 서너 해 전에 쌀 두 가마 값을 주고 사온 것이다. 타원형에 손잡이까지 달려 있다. 크기도 긴 쪽이 어른 한 발은 좋이 된다. 오랜 풍상으로 모난 데 없고 청태마저 파란 것이 고색이 창연하다. 뜰이 좁아 연못을 가질 형편이 못 되는 나에게 이 돌확은 연못 구실을 한다. 맑은 샘물을 길어다 붓고 가끔씩 가서 수기(水氣)를 쐬기도 하고, 아니면 부평초를 띄워 두거나 수련 몇 포기를 심어 두고 그 윤기 나는 잎이며 청초한 꽃을 즐기기도 한다. 나머지 하나는 내가 손수 파낸 것이다. 크기는 앞엣 것들보다 작은 편이지만 펑퍼짐한 강돌을 옮겨다 정으로 쪼아 낸 것이어서 야..

여름밤 / 노천명

앞벌 논가에서 개구리들이 소낙비 소리처럼 울어대고 삼밭에서 오이 냄새가 풍겨오는 저녁 마당 한 귀퉁이에 범산넝쿨, 엉겅퀴, 다북쑥, 이런 것들이 생짜로 들어가 한데 섞여 타는 냄새란 제법 독기가 있는 것이다. 또한 거기 다만 모깃불로만 쓰이는 이외의 값진 여름밤의 운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달 아래 호박꽃이 화안한 저녁이면 군색스럽지 않아도 좋은 넓은 마당에는 이 모깃불이 피워지고 그 옆에는 멍석이 깔려지고 여기선 여름살이 다림질이 한창 벌어지는 것이다. 멍석자리에 이렇게 앉아 보면 시누이와 올케도 정다울 수 있고, 큰 애기에게 다림질을 붙잡히며, 지긋한 나이를 한 어머니는 별처럼 머언 얘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함박지에는 가주 쪄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강냉이가 먹음직스럽게 담겨 나오는 법이겠다. 쑥대불..

수 필 / 신달자

자질구레하다 손톱 거스러미와 옷섶 보푸라기가 일렁인다 잘 입은 정장에 단추 하나가 떨어진 것도 보인다 그 행간에 몇 개 염전이 산다 불가촉천민의 닳은 숟가락 보인다 가파른 언덕으로 리어카를 끌고 가는 등 보인다 지나치게 도도한 목을 꺽고 두 손을 모으고 생각에 잠긴 사람 있다 맨얼굴로 정직을 쟁기질하는 농부도 보인다 그 너머 정겹게 오라는 손짓이 있다 그것을 지나야 한다 맨얼굴 아래 더 아래 다시 가고 다시 가노라면 묵은 짐 내리게 하는 평안의 의자가 거기 있다 후미진 골목 가장자리 나팔꽃이 활짝 아침 열고 따뜻한 물속에 두 발 담그니 아 좋다.

읽고 싶은 시 2014.06.02

그 믐 달 / 나도향

나는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달은 너무 요염(妖艶)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버리는 초생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風霜)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怨恨)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哀絶)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의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公主)와 같은 달이다. 초생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한등(客窓寒燈)에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