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 10

세상에 나와 나는 / 나태주

​ 세상에 나와 나는아무 것도 내 몫으로차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꼭 갖고 싶은 것이 있었다면푸른 하늘빛 한 쪽바람 한 줌노을 한 자락​더 욕심을 부린다면굴러가는 나뭇잎새하나​세상에 나와 나는어느 누구도 사랑하는 사람으로간직해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꼭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면단 한 사람눈이 맑은 그 사람가슴속에 맑은 슬픔을 간직한 사람​더 욕심을 부린다면늙어서 나중에도 부끄럽지 않게만나고 싶은 한 사람그대 출처 세상에 나와 나는/나태주, 작성자 소천의 샘터

읽고 싶은 시 2024.11.29

봄이 오는 길목에서 / 윤소천

며칠 전 남쪽 바닷가에 사는 친지로부터 매화가 피었다는 봄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이곳은 춘설春雪이 밤새 내렸다. 뜰에 나가 보니 잔설이 쌓여있는 산수유 매화의 꽃눈이 또렷해져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사유思惟에 눈뜨던 시졀, 무서리에 자지러진 가을을 지나 눈 내린 혹한의 겨울 그리고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는 유년의 기억마저 잊게 했다. 그러나 그 고뇌와 아픔의 시간 들이 이제는 잃어버린 나를 찾는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작은 구름이 가볍게 하늘을 흘러간다 /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고 꽃은 풀숲에서 웃는다 /어디를 보아도 고단한 눈은 이제 /책에서 읽은 것을 잊으려 한다 / 내가 읽었던 어려운 것들은 / 모두 먼지처럼 날아가 버렸으며 / 겨울날의 환상에 불과했다 / 나의 눈은 깨끗하게 정화되어 / 새..

소천의 수필 2024.11.23

가슴만 남은 솟대 - 책 머리에 / 윤소천

​사랑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우리는 이 사랑의 힘으로 모든 어려움과 죽음까지도 이겨낼 수있다. 지나온 길 돌아보면, 꿈결처럼 아득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해 오고는 한다.서리맞아 희끗한 머리카락, 어느새 반생을 훌쩍 넘어 종심從心에 서 있다. 사유思惟에 눈뜨던 시절. 무지와 오욕의 늪을 헤매던 여름 골짜기, 어두운 밤길 별빛만바라보고 숨이 턱에 차 걷던 고갯길들. 늦가을 무서리에 자지러진 산마루는 바람마저드세었다. 그리고 한겨울 눈 내리고 내려, 잠속에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는 유년의 기억마저 잊게 했다. 먼 길 돌아와, 이제 봄이 오는 길목의 바람 잔 들길. 자연에 몸을 맡기고 침묵의 겨울을 지나면, 나도 모르게 개안開眼한 내가 봄의 길목에 서 있다. 내 책상 위에는 소박한 빵과 스..

소천의 수필 2024.11.23

11월의 노래 / 김용택

​해 넘어가면당신이 더 그리워집니다​잎을 떨구며피를 말리며가을은 자꾸 가고당신이 그리워마을 앞에 나와산그늘 내린 동구길 하염없이 바라보다산그늘도 가버린 강물을 건넙니다​내 키를 넘는 마른 풀밭들을 헤치고강을 건너강가에 앉아헌 옷에 붙은 풀씨들을 떼어내며당신 그리워 눈물 납니다​못 견디겠어요아무도 닿지 못할세상의 외로움이마른 풀잎 끝처럼 뼈에 스칩니다​가을은 자꾸 가고당신에게 가 닿고 싶은내 마음은 저문 강물처럼 바삐 흐르지만나는 물 가버린 물소리처럼 허망하게빈 산에 남아억새꽃만 허옇게 흔듭니다​해 지고가을은 가고당신도 가지만서리 녹던 내 마음의 당신 자리는식지 않고 김 납니다 출처. 11월의 노래 / 깅용택. 작성자 소천의 샘터

읽고 싶은 시 2024.11.20

구상 선생님께 / 이해인

세상엔 시가 필요하다고유언처럼 말씀하신 시인 선생님오늘 우리는 모두각자의 자리에서 바삐 지내다가이렇게 아름다운 수도원 성당에11월의 나뭇잎을 닮은하나의 시가 되고 노래 되어기도하는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인 윤동주와도같은 해에 태어나신 강과 밭과 예수님의 시인 구상 선생님탄생 100주년은 세상에서아무나 축복받은 것이 아니겠지요후대에도 기억될 만큼그 삶이 훌륭했다는 증거겠지요 잠든 혼에 불을 놓는 예언자적 시인으로삶을 관조하고 연구하는 철학자로깊이 명상하는 기도자로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언론인으로문학을 가르치는 넓은 마음의 스승으로오랜 세월 우리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남에게 관대하고 스스로에겐 엄격하게 대하는 것이덕과 지혜임을 일러주셨습니다우정을 잘 가꾸는 당신만의 비법도지인들에게 살짝 알..

읽고 싶은 시 2024.11.19

괜찮은 척하며 사는 거지 / 이해인

사람들은 제 각각 괜찮은 척하며 살아가는 거지그러나 괜찮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프지 않은 척하며 살아내는 거지,그러나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힘들지 않은 척하며 이겨내는 거지그러나 힘들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보이지는 않지만모두 자신 만의 삶의 무게를이고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남의 짐은 가벼워 보이고내 짐은 무겁게 느끼며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모퉁이를 돌아가 봐야거기에 무엇이 있는지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가 보지도 않고 아는척 해 봐야득되는 게 아무것도 없지요.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져 아픔과 고민이 다 쓸려간다 해도꼭 붙들어야 할 것이 있으니바로 믿음이라는 마음입니다.  출처. 괜찮은 척하며 사는 거지 / 이해인, 작성자 소천의 샘터

읽고 싶은 시 2024.11.17

11월의 나무처럼 / 이해인

사랑이 너무 많아도사랑이 너무 적어도사람들은 쓸쓸하다고 말하네요​보이게 보이지 않게큰 사랑을 주신 당신에게감사의 말을 찾지 못해나도 조금은 쓸쓸한 가을이에요​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내어놓은 사랑을 배우고 싶어요욕심의 그늘로 괴로웠던 자리에고운 새 한마디 앉히고 싶어요​11월의 청빈한 나무들 처럼나도 작별 인사를 잘하며갈 길을 가야겠어요 출처. 11월의 나무처럼/이해인, 작성자 소천의 샘터

읽고 싶은 시 2024.11.14

내 마음에 그려 놓은 사람 / 이해인

내 마음에 그려 놓은마음이 고운 그 사람이 있어서세상은 살맛 나고나의 삶은 쓸쓸하지 않습니다​그리움은 누구나 안고 살지만이룰 수 있는 그리움이 있다면삶이 고독하지 않습니다​하루 해 날마다 뜨고 지고눈물 날것 같은 그리움도 있지만나를 바라보는 맑은 눈동자살아 빛나고날마다 무르익어 가는 사랑이 있어나의 삶은 의미가 있습니다​내 마음에 그려 놓은마음 착한 그 사람이 있어서세상이 즐겁고살아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출처, 내 마음에 그려 놓은 사람/이해인 작성자 소천의 샘터

읽고 싶은 시 2024.11.10

행복해진다는 것 / 헤르만 헤세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 그런데도 그 온갖 도덕 온갖 계명을 갖고서도 사람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네 그것은 사람들 스스로 행복을 만들지 않는 까닭 ​인간은 선을 행하는 한 누구나 행복에 이르지 스스로 행복하고 마음속에서 조화를 찾는 한 그러니까 사랑을 하는 한...사랑은 유일한 가르침 세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단 하나의 교훈이지 ​예수도 부처도 공자도 그렇게 가르쳤다네 모든 인간에게 세상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의 가장 깊은 곳 그의 영혼 그의 사랑하는 능력이라네 ​보리죽을 떠먹든 맛있는 빵을 먹든 누더기를 걸치든 보석을 휘감든 사랑하는 능력이 살아 있는 한 세상은 순수한 영혼의 화음을 울렸고 언제나 좋은 세상 옳은 ..

읽고 싶은 시 2024.11.03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무등산(無等山) / 윤소천

빛고을 광주光州를 안고 있는 무등산은 인근 사방 어디에서 보아도 자애롭고 든든한 모습이다.무등無等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 세상만물이 평등하다는 하늘의 섭리를 보여주고 있다. 부드러운무등의 능선은 푸른 하늘에 욕심 없이 그어놓은 한 가닥 선線이다. 나는 무등산 아래 빛고을 유동柳洞, 버들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의 품에서 포근했던 유년시절, 방문을 열고 마루에 서면 탱자 울 너머로 무등산이 보였다. 무등산에 눈이 세 번 오면 시내에 첫눈이 온다는 말에무등산에 하얀 눈이 내린 아침이면, 누나는 일찍 일어나 ‘눈 왔다. 무등산에 눈 왔어.’하고 우리를 깨우고, 우리 형제들은 우르르 마루로 나와 무등산을 바라보았다. 학창시절 방학이 되어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면, 무등산은 저 멀리서 먼저 어서 오라는 ..

소천의 수필 2024.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