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743

눈 / 오세영

순결한 자만이 자신을 낮출 수 있다 자신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은 남을 받아들인다는 것 인간은 누구나 가장 낮은 곳에 설 때 사랑을 안다 살을 에는 겨울 추위에 지친 인간은 제각기 자신만의 귀가길을 서두르는데 왜 눈은 하얗게 하얗게 내려야만 하는가 하얗게 하얗게 혼신의 힘을 기울여 바닥을 향해 투신하는 눈 눈은 낮은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녹을 줄을 안다 나와 남이 한데 어울려 졸졸졸 흐르는 겨울 물소리 언 마음이 녹은 자만이 사랑을 안다

읽고 싶은 시 2021.02.09

기쁨이란 / 이해인

매인데 없이 가벼워야만 기쁨이 된다고 생각했다 한 톨의 근심도 없는 잔잔한 평화가 기쁨이라고 석류처럼 곱게 쪼개지는 것이 기쁨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며칠 앓고 난 지금의 나는 삶이 가져오는 무거운 것 슬픈 것 나를 힘겹게 하는 모욕과 오해 가운데서도 기쁨을 발견하여 보석처럼 갈고 닦는 지혜를 순간마다 새롭게 배운다 내가 순해지고 작아져야 기쁨은 빛을 낸다는 것도 다시 배운다 어느 날은 기쁨의 커다란 보석상을 세상에 차려놓고 큰 치를 하고 싶어

읽고 싶은 시 2021.02.01

감사와 행복 / 이해인

내 하루의 시작과 마지막 기도 한 해의 시작과 마지막 기도 그리고 내 한 생애의 처음과 마지막 기도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되도록 감사를 하나의 숨결 같은 노래로 부르고 싶다 감사하면 아름다우리라 감사하면 행복하리라 감사하면 따뜻하리라 감사하면 웃게되리라 감사가 힘들 적에도 주문을 외우듯이 시를 읊듯이 항상 이렇게 노래해 봅시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살아서 하늘과 바다와 산을 바라볼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하늘의 높음과 바다의 넓음과 산의 깊음을 통해 오래오래 사랑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어 행복합니다.

읽고 싶은 시 2021.01.24

新年詩 / 조병화

흰 구름 뜨고 바람 부는 맑은 겨울 찬 하늘 그 無限을 우러러보며 서있는 大地의 나무들처럼 오는 새해는 너와 나, 우리에게 그렇게 꿈으로 가득하여라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오는 영원한 日月의 영원한 이 回傳 속에서 너와 나, 우리는 약속된 여로를 동행하는 有限한 생명 오는 새해는 너와 나, 우리에게 그렇게 사랑으로 더욱더 가까이 이어져라.

읽고 싶은 시 2021.01.18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 정호승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고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 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가는 어두운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을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기다림을 만나 얼씨구나 부등켜안고 웃어보리라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 보리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 눈 내리는 보리밭 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읽고 싶은 시 2021.01.08

새해 / 구상

내가 새로와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내가 새로워져서 인사를 하면 이웃도 새로와진 얼굴을 하고 새로운 내가 되어 거리를 가면 거리도 새로운 모습을 한다 지난날의 쓰라림과 괴로움은 오늘의 괴로움과 쓰라림이 아니요 내일도 기쁨과 슬픔이 수놓겠지만 그것은 생활의 율조일 따름이다 흰 눈같이 맑아진 내 의식은 이성의 햇발을 받아 번쩍이고 내 심호흡한 가슴엔 사랑이 뜨거운 새 피로 용솟음친다 꿈은 나의 충직과 일치하며 나의 줄기찬 노동은 고독을 쫓고 하늘을 우러러 소박한 믿음을 가져 기도는 나의 일과의 처음과 끝이다 이제 새로운 내가 서슴없이 맞는 새해 나의 인생, 최고의 성실로서 꽃피울 새해여!

읽고 싶은 시 2021.01.02

진눈깨비 / 나태주

진 눈 깨 비 식을 대로 식어버린 그대 입술의 마지막 돌아서던 그 키스에 이승에서 다시 안 볼 사람 앞 맵고 짜던 그 눈총 속에 어쩌면 얌전하디얌전하게 잠들어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진눈깨비 한 마장. 용캐도 안 잊어먹고 하늘의 그 어드메 산수갑산쯤에서 들키지 않게 숨어 있다가 오늘에사 나를 찾아오시는 이 시늉, 이 매질들인가. 누구의 선 귀때기나 울려주려고 누구의 슬픔에 뿌리를 달아주려고 느지막이 이 투정, 이 안달들인가. 그러나 이제는 적셔도 젖지 않을 눈물, 울려도 울지 않을 나의 삼경(三更). 서리무지개 서서 줄기줄기 무리져서 이승에서 다시 안 볼 사람 앞 매질하며 달려오시는 그대. 고꾸라지며 맨발 벗고 내게 오시는 그대. ( 1971 )

읽고 싶은 시 2020.12.27

황국(黃菊) 몇 송이 / 황동규

소설(小雪) 날 엉거주춤 붙어있는 나라 꼬리 장기곶 수리(修理) 중 문 닫은 등대박물관 옆 절벽 위에서 바람도 제대로 불지 않고 이리 불다 저리 불다 오징어 굽는 아줌마들의 눈만 쓰리게 하는 쓸쓸한 잿빛 바다를 한없이 만나보고 돌아오다 무심히 기림사에 들러 고요한 흥분 서린 황금빛 보살상을 만나보고 차 한대 마주 오지 않는 가파른 성황재를 마냥 오르다 잿빛 찬바람 속에 고개 들고 빛나는 황국 몇 송이. 눈 저리게 하는 아 살아있는 보살상들 ! 얼은 눈물 조각은 아니겠지 꽃잎에 묻어있던 조그만 발광체들.

읽고 싶은 시 2020.12.17

12월 / 오세영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 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 유성처럼 소리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무를 위해서 꿈이 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 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 안쓰러마라 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사랑은 성숙하는 것 화안히 밝아오는 어둠 속으로 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 눈 떠라 절망의 그 빛나는 눈

읽고 싶은 시 2020.12.09

저물녁의 노래 / 강은교

저물녘에 우리는 가장 다정해진다. 저물녘에 나뭇잎들은 가장 따뜻해지고 저물녘에 물 위의 집들은 가장 환한 불을 켜기 시작한다. 저물녘을 걷고 있는 이들이여 저물녘에는 그대의 어머니가 그대를 기다리리라. 저물녘에 그대는 가장 부드러운 편지 한장을 들고 저물녘에 그대는 그 편지를 물의 우체국에서 부치리라. 저물녘에는 그림자도 접고 가장 푸른 물의 이불을 펴리라. 모든 밤을 끌고 어머니 곁에서.

읽고 싶은 시 2020.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