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743

또다시 겨울 문턱에서 / 황동규

대놓고 색기 부리던 단풍 땅에 내려 흙빛이 되었다. 개울에 들어간 녀석들은 찬 물빛 되었다. 더 이상 뜨거운 눈물이 없어도 될 것 같다. 눈 내리기 직전 단색의 하늘, 잎을 벗어버린 나무들, 곡식 거둬들인 빈 들판, 마음보다 몸 쪽이 먼저 속을 비우는구나. 산책길에서는 서리꽃 정교한 수정 조각들이 저녁 잡목 숲을 훤하게 만들고 있겠지. 이제 곧 이름 아는 새들이 눈의 흰 살결 속을 날 것이다. 이 세상에 눈물보다 밝은 것이 더러 남아 있어야 마감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견딜만 한 생애가 그려지지 않겠는가?

읽고 싶은 시 2020.11.27

내 나이 가을에 서서 / 이해인

젊었을 적 내 향기가 너무 진해서 남의 향기를 맡을 줄 몰랐습니다. 내 밥그릇이 가득 차서 남의 밥그릇이 빈 줄을 몰랐습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고 사랑에 갈한 마음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세월이 지나 퇴색의 계절 반짝 반짝 윤이 나고 풍성했던 나의 가진 것들이 바래고 향기도 옅어지면서 은은히 풍겨오는 다른 이의 향기를 받게 되었습니다. 고픈 이들의 빈 소리도 들려옵니다. 목마른 이의 갈라지고 터진 마음도 보입니다. 이제서야 보이는 이제서야 들리는 내 삶의 늦은 깨달음. 이제는 은은한 국화꽃 향기 같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내 밥그릇 보다 빈 밥그릇을 먼저 채 우겠습니다. 받은 사랑 잘 키워서 풍성히 나눠 드리겠습니다. 내 나이 가을에 겸손의 언어로 채우겠습니다.

읽고 싶은 시 2020.11.23

11 월 / 오세영

지금은 태양이 낮게 뜨는 계절 돌아보면 다들 떠나갔구나 제 있을 꽃자리 제 있을 잎자리 빈들을 지키는 건 갈대뿐이다. 상강(霜降) 서릿발 차가운 칼날 앞에서 꽃은 꽃끼리, 잎은 잎끼리 맨땅에 스스로 목숨을 던지지만 갈대는 호올로 빈 하늘을 우러러 시대를 통곡한다. 시들어 썩기보다 말라 부서지기를 택하는 그의 인동(忍冬) 갈대는 목숨들이 가장 낮은 땅을 찾아 몸을 눕힐 때 오히려 하늘을 향해 선다. 해를 받든다.

읽고 싶은 시 2020.11.15

내가 쓰고 싶은 시 / 홍윤숙

세상과 맞서는 은장도 푸른 시절은 이미 지났다 이제부터는 연푸른 잎사귀에 이슬 맺혀 잠시 반짝이고 촉촉이 젖어 아득히 먼 곳에 그리움 전하는 연보랏빛 가을 들국화 같은 작고 애틋하고 따뜻한 시 쓰고 싶다 돌아서 하늘하늘 가는 모가지 부러질 듯 흔들리며 하늘 향해 고백하는 그런 시를 쓰고 싶다 남은 시간은...... 상처로 굳어져 어쩌다 쓰는 시엔 늘 어딘가 피 한 방울 묻어 있다

읽고 싶은 시 2020.11.09

비와 인생 / 피천득

삶이란!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하는 일이요. 죽음이란! 우산이 더이상 펼쳐지지 않는 일이다. 성공이란! 우산을 많이 소유하는 일이요. 행복이란! 우산을 많이 빌려주는 일이고 불행이란! 아무도 우산을 빌려주지 않는 일이다. 사랑이란! 한쪽 어깨가 젖는데도 하나의 우산을 둘이 함께 쓰는 것이요. 이별이란! 하나의 우산 속에서 빠져나와 각자의 우산을 펼치는 일이다. 여인이란! 비 오는 날 우산 속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요. 부부란! 비 오는 날 정류장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비를 맞으면서 혼자 걸어갈 줄 알면 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요. 비를 맞으면서 혼자 걸어가는 사람에게 우산을 내밀 줄 알면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비요 사람을 아름..

읽고 싶은 시 2020.11.03

시를 읽는다 / 박완서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읽고 싶은 시 2020.10.16

낙엽 / 레미 구르몽

시몬, 나무 잎새 떨어진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은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은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은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은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읽고 싶은 시 2020.10.12

가을 엽서 / 이해인

하늘이 맑으니바람도 맑고내 마음도 맑습니다 오랜 세월 사랑으로 잘 익은그대의 목소리가 노래로 펼쳐지고들꽃으로 피어나는 가을 한 잎 두 잎나뭇잎이 물들어떨어질 때마다그대를 향한나의 그리움도한 잎 두잎익어서 떨어집니다 사랑하는 이여내 마음의 가을 숲으로어서 조용히웃으며 걸어 오십시오 낙엽 빛깔 닮은커피 한잔 마시면서우리, 사랑의 첫 마음을향기롭게 피워올려요쓴맛도 달게 변한우리 사랑을 자축해요 지금껏 살아온 날들이힘들고 고달팠어도함께 고마워하고앞으로 살아갈 날들이조금은 불안해도새롭게 기뻐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부담없이 서늘한 가을바람가을 하늘 같은 사람이 되기로 해요

읽고 싶은 시 2020.10.04

9월 / 오세영

코스모스는 왜 들길에서만 피는 것일까 아스팔트가 인간으로 가는 길이라면 들길은 하늘로 가는 길. 코스모스 들길에서는 문득 죽은 누이를 만날 것만 같다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9월은 그렇게 삶과 죽음이 지나치는 달 코스모스 꽃잎에서는 항상 하늘 냄새가 난다 문득 고개를 들면 벌써 엷어지기 시작하는 햇살 태양은 황도에서 이미 기울었는데 코스모스는 왜 꽃이 지는 계절에 피는 것일까 사랑이 기다림에 앞서듯 기다림은 성숙에 앞서는 것 코스모스 피어나듯 9월은 그렇게 하늘이 열리는 달이다.

읽고 싶은 시 2020.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