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743

수 필 / 신달자

자질구레하다 손톱 거스러미와 옷섶 보푸라기가 일렁인다 잘 입은 정장에 단추 하나가 떨어진 것도 보인다 그 행간에 몇 개 염전이 산다 불가촉천민의 닳은 숟가락 보인다 가파른 언덕으로 리어카를 끌고 가는 등 보인다 지나치게 도도한 목을 꺽고 두손을 모으고 생각에 잠긴 사람 있다 맨얼굴로 정직을 쟁기질하는 농부도 보인다 그 너머 정겹게 오라는 손짓이 있다 그것을 지나야 한다 맨얼굴 아래 더 아래 다시 가고 다시 가노라면 묵은 짐 내리게 하는 평안의 의자가 거기 있다 후미진 골목 가장자리 나팔꽃이 활짝 아침 열고 따뜻한 물속에 두 발 담그니 아 좋다.

읽고 싶은 시 2021.06.03

부치지 않은 편지 / 정호승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읽고 싶은 시 2021.05.10

봄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읽고 싶은 시 2021.04.16

참된 아름다움 / 칼릴 지브란

사랑을 품고 있는 영혼만이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영혼만이 아름다움과 더불어 살고 성숙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아름다움은 지혜로운 사람과 고귀한 영혼을가진 사람에게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아름다운 영혼으로부터 발산하는 한 줄기의 빛입니다 마치 대지의 깊은 곳에서 솟아 나와 한 송이 꽃에게 온갖 빛깔과 향기를 주는 생명과도 같이 우리 인간에게 빛을 던져 주는 것입니다 참된 아름다움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영혼의 일치 속에 깃드는 것입니다

읽고 싶은 시 2021.03.09

겨 울 / 조병화

침묵이다 침묵으로 침묵으로 이어지는 세월 세월 위로 바람이 분다 바람은 지나가면서 적막한 노래를 부른다 듣는 사람도 없는 세월 위에 노래만 남아 쌓인다 남아 쌓인 노래 위에 눈이 내린다 내린 눈은 기쁨과 슬픔 인간이 살다간 자리를 하얗게 덮는다 덮은 눈 속에서 겨울은 기쁨과 슬픔을 가려내어 인간이 남긴 기쁨과 슬픔으로 봄을 준비한다 묵묵히

읽고 싶은 시 2021.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