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710

성탄 편지 / 이해인

친구여, 알고 계시지요? 사랑하는 그대에게 제가 드릴 성탄 선물은 오래 전부터 가슴에 별이되어 박힌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 안에 꽃피고 열매 맺은 우정의 기쁨과 평화인 것을. 슬픈 이를 이해하고 미운 이를 용서하며 우리 모두 누군가의 집이 되어 등불을 밝히고 싶은 성탄절 잊었던 이름들을 기억하고 먼데 있는 이들을 가까이 불러들이며 문을 엽니다. 죄가 많아 숨고 싶은 우리의 가난한 부끄러움도 기도로 봉헌하며 하얀 성탄을 맞이해야겠지요? 자연의 파괴로 앓고 있는 지구와 구원을 갈망하는 인류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 다시 그대에게 드립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새로이 태어나는 주님의 뜻을 우리도 성모님처럼 겸손이 받아 안기로 해요. 그동안 못다 부른 감사의 노래를 함께 부르기로 해요. 친구여, 알고 계..

읽고 싶은 시 2023.12.23

그 네 / 정호승

너도 그네를 타보면 알거야 사랑을 위해 수평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그동안 네가 수평을 유지해본 적이 없어 한없이 슬펐다는 것을 오늘은 빈 그네를 힘껏 밀어보아라 그네가 중심을 잡고 고요히 수평의 자세를 갖추지 않느냐 너도 너의 가난한 사랑을 위해 수평의 자세를 갖추기 위해 진실해라 너는 한 때 좌우로 혹은 위아래로 흔들리지 않으면 그네가 아니라고 더 높이 떠올라 산을 넘어가야 한다고 마치 손이라도 놓을 듯 그네를 탔으나 결국 그네는 내려와 수평의 자세를 잡지 않더냐 사랑한다는 것은 늘 그네를 타는 일이므로 부디 그네에서 뛰어내리지는 마라 수평인 그대로 고요해라

읽고 싶은 시 2023.12.18

버들잎 강의 / 신달자

강의실은 구 층에 있었다 지하 삼 층 차고에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한순간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일이 나에겐 예삿일이다 높은 곳을 죽 올라가는 그 재미로 계단을 잊은지 오래다 아 지겨워 하나하나 밞아 언제 오르나 단숨에 잡아 보려 했던 북두칠성 아직 멀어서 나는 오로지 오르는 일에 길들고 비행을 섬긴다 그렇게 쑤욱 솟구쳐 올라가서 강의실에선 낮아지는 걸 가르친다 문학이란 적어도 낮아져 바짝 엎드려 바닥의 그늘을 줍는 것이라고 그늘의 속잎을 끌어내고 나무의 속말을 듣는 것이라고 저 버들잎을 보아라 모든 나무는 하늘 무섭지 않게 뻗어 오르는데 저 버들잎만 겸허히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려 자신의 공간을 비워주고 있지 않느냐 비워주는 일은 마음을 보는 사람만이 하는 일이다 몸을 낮춰야 마음이 보여 그래야 푸른 피가 ..

읽고 싶은 시 2023.12.10

창문 / 정호승

창문은 닫으면 창이 아니라 벽이다 창문은 닫으면 문이 아니라 벽이다 창문이 창이 되기 위해서는 창과 문을 열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세상의 모든 창문이 닫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열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아는 데에 평생이 걸렸다 지금까지는 창문을 꼭 닫아야만 밤이 오는 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창문을 열었기 때문에 밤하늘에 별이 빛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제 창문을 연다 당신을 향해 창문을 열고 별을 바라본다 창문을 열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당신의 모습이 보인다

읽고 싶은 시 2023.12.10

그리운 강 / 도종환

사람들은 늘 바다로 떠날 일을 꿈꾸지만 나는 아무래도 강으로 가야겠다 가없이 넓고 크고 자유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작고 따뜻한 물소리에서 다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해일이 되어 가까운 마을부터 휩쓸어버리거나 이 세상을 차갑고 거대한 물로 덮어버린 뒤 물보라를 날리며 배 한 척을 저어나가는 날이 한 번 쯤 있었으면 하지만 너무 크고 넓어서 많은 것을 가졌어도 아무 것도 손에 쥐지 못한 것처럼 공허한 바다가 아니라 쏘가리 치리 동자개 몇 마리만으로도 넉넉할 수 있는 강으로 가고 싶다 급하게 달려가는 사나운 물살이 아니라 여유 있게 흐르면서도 온 들을 다 적시며 가는 물줄기와 물살에 유연하게 다듬어졌어도 속으론 참 단단한 자갈밭을 지나 천천히 천천히 걸어오고 싶다 욕심을 버려서 편안한 물빛..

읽고 싶은 시 2023.12.10

축 복 / 도종환

이른 봄에 내 곁에 와 피는 봄꽃만 축복이 아니다 내게 오는 건 다 축복이었다 고통도 아픔도 축복이었다 뼈저리게 외롭고 가난했던 어린날도 내 발을 붙들고 떨어지지 않던 스무 살 무렵의 진흙덩이 같던 절망도 생각해 보니 축복이었다 그 절망 아니었으면 내 뼈가 튼튼하지 않았으리라 세상이 내 멱살을 잡고 다리를 걸어도 길바닥에 팽개치고 어두운 굴속에 가둔 것도 생각해보니 영혼의 담금질이었다 한 시대가 다 참혹하였거늘 거인 같은 바위 같은 편견과 어리석음과 탐욕의 방파제에 맞서다 목숨을 잃은 이가 헤아릴 수 없거늘 이렇게 작게라도 물결치며 살아 있는 게 복 아니고 무엇이랴 육신에 병이 조금 들었다고 어이 불행이라 말하랴 내게 오는 건 통증조차도 축복이다 죽음도 통곡도 축복으로 바꾸며 오지 않았는가 이 봄 어이 ..

읽고 싶은 시 2023.12.08

일상의 행복 / 김남조

스위치 누르자 전등 켜져 밝다 수도에서 더운물 찬물 잘 나온다 냉장고에 일용할 음식의 한 가족 살고 작동 즉시 전율 휘감는 음악 한 그루 나무에도 공생하는 새와 곤충들 있어 저들 숨쉬는 허파와 그 심장 피주머니 숙연하다 그림자 한 필 드리우는 구름과 지척에 일렁이는 바람 손님들 이즈음 왜 이런지 몰라 사는 일 각별히 소중한지 몰라 모든 사람 누군가를 사랑하는 힘으로 준령 오르고 있으리 눈물 말리며 걸으리 그러한 이 세상 참 잘 생겼다고 왜 문득 가슴 움켜잡는지 몰라

읽고 싶은 시 2023.12.02

성탄 밤의 기도 / 이해인

낮게 더 낮게 작게 더 작게 아기가 되신 하느님 빛의 예수여 모든 이가 당신을 빛이라 부르는 오늘 밤은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밤 빛으로 오시는 당신을 맞이하여 우리도 한 점 빛이 되는 빛나는 성탄 밤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을 지니시고 ‘세상’이라는 구유, 우리 ‘마음’이라는 구유 위에 아기로 누워 계신 작은 예수여, 진정 당신이 오시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겐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기쁨도 없습니다 평화도 없습니다 구원도 없습니다 당신이 오심으로 우리는 희망과 기쁨 속에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평화와 구원의 의미를 깊이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티 없이 맑고 천진한 당신이 누우시기엔 너무도 어둡고 혼탁한 세상이오나 어서오십시오 진리보다는 불의가 커다란 언덕으로 솟고 ..

읽고 싶은 시 2023.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