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 오세영 순결한 자만이 자신을 낮출 수 있다자신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은 남을 받아들인다는 것인간은 누구나 가장 낮은 곳에 설 때 사랑을 안다살얼음 에는 겨울추위에 지친 인간은 제각기 자신만의 귀갓길을 서두르는데 왜 눈은 하얗게 하얗게 내려야만 하는가하얗게 하얗게 혼신의 힘을 기울여 바닥을 향해 투신하는 눈, 눈은 낮은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녹을 줄을 안다나와 남이 한데 어울려 졸졸졸 흐르는 겨울물 소리언 마음이 녹은 자만이 사랑을 안다 읽고 싶은 시 2025.02.11
폭설, 그 이튿날 / 안도현 눈이 와서,대숲은 모처럼 누었다대숲은 아주 천천히눈이 깔라놓은 구들장 속으로 허리를 들이밀었을 것이다아침해가 떠올라도 자는 척,게으런 척,꿈쩍도 하지 않는 것은밤새 발이 곱은 참새들발가락에 얼음이 다 풀리지 않았기 때문참새들이 재재거리며 대숲을 빠져나간 뒤에대숲은 눈을 툭툭 털고일순간, 벌떡 일어날 것이다 읽고 싶은 시 2025.02.11
봄 /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어디 뻘밭 구석이거나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흔들어 깨우면 눈 비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읽고 싶은 시 2025.02.11
입춘이면 / 박노해 입춘이면 몸을 앓는다잔설 깔린 산처럼 모로 누워은미한 떨림을 듣는다먼 데서 바람이 바뀌어 불고눈밭이 눈물로 녹아내리고언 겨울 품에서 무언가 나오고산 것과 죽은 것이창호지처럼 얇구나떨어져 자리를 지키는 씨앗처럼아픈 몸 웅크려 햇빛 쪼이며오늘은 가만히 숨만 쉬어도 좋았다언 발로 걸어오는 봄 기척은미한 발자국 소리 들으며 읽고 싶은 시 2025.02.03
서울복음 2 / 정호승 너희는 너희에게 상처 준 자를 용서하라.한 송이 눈송이 타는 가슴으로마른 나뭇가지마다 하얀 눈꽃으로너희는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감사하라.감사가 없는 곳에 사랑이 없고용서가 없는 곳에 평화가 없나니너희는 평화가 너희를 다스리게 하라.정직한 자가 이 땅 위에 꽃을 피우고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너희는 사랑하라.굶주린 자의 밥그릇을 빼앗지 말고목마른 자의 물대접을 차버리지 말고오직 너희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라.눈 내리는 새해 아침에는절망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모여 앉아눈물의 굳은 빵을 나눠 먹는 일은 행복하다.날마다 사랑의 나라를 그리워하면사랑하는 일보다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다.너희는 바람이 불 때마다언제나 괴로워하지 않았느냐.사랑과 믿음의 어둠은 깊어가서바람에 풀잎들이 짓밟히지 않았느냐.아직도 가난할 자.. 읽고 싶은 시 2025.01.30
행복해진다는 것 / 헤르만 헤세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다른 아무것도 없다네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그런데도그 온갖 도덕온갖 계명을 갖고서도사람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네그것은 사람들 스스로 행복을만들지 않는 까닭인간은 선을 행하는 한누구나 행복에 이르지스스로 행복하고마음속에서 조화를 찾는 한그러니까 사랑을 하는 한...사랑은 유일한 가르침세상이 우리에게 물려준단 하나의 교훈이지예수도 부처도 공자도그렇게 가르쳤다네모든 인간에게 세상에서한 가지 중요한 것은그의 가장 깊은 곳그의 영혼그의 사랑하는 능력이라네보리죽을 떠먹든 맛있는 빵을 먹든누더기를 걸치든 보석을 휘감든사랑하는 능력이 살아 있는 한세상은 순수한 영혼의 화음을 울렸고언제나 좋은 세상옳은 세상이었다네 읽고 싶은 시 2025.01.30
새벽의 시 / 정호승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알았다나뭇잎이 나무의 눈물인 것을새똥이 새의 눈물인 것을어머니가 인간의 눈물인 것을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알았다나무들의 뿌리가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이얼마나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새들이 우리의 더러운 지붕 위에 날아와똥을 눈다는 것이그 얼마나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알았다거리의 노숙자들이 잠에서 깨어나어머니를 생각하는 새벽의 새벽이 되어서야눈물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다 읽고 싶은 시 2025.01.29
구상무상(具常無常) / 구 상 이제 세월처럼 흘러가는남의 세상 속에서가쁘던 숨결은 식어가고뉘우침마저 희미해가는 가슴. 나보다 진해진 그림자를밟고 서면꿈결 속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그저 심심해 서 있으면헤어진 호주머니 구멍으로부터바람과 추억이 새어나가고꽁초도 사랑도 흘러나가고무엇도 무엇도 떨어져버리면 나를 취하게 할 아편도 술도 없어홀로 깨어 있노라.아무렇지도 않노라. 읽고 싶은 시 2025.01.12
삶 인생 행복 / 진 웹스터 대부분 사람들은삶을 마치 경주라고생각하는 듯해요 목적지에 빨리도달하려고 헉헉거리며달리는 동안 주변에 있는아름다운 경치는 모두 놓쳐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경주가끝날 때 쯤엔자기가 너무 늙었다는 것목적지에 빨리도착하는 건별 의미가 없다는 걸알게 되지요 그래서 나는 길가에 주저 앉아서행복의 조각들을하나씩 주워 모을 거예요 읽고 싶은 시 2025.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