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738

기억하라 / 박노해

기억하라 세상 모든 것의 시작은지금 너 하나로부터가 아니라는 것을 현실이 아무리 엉망진창으로 보여도우리 인생은 장엄하게 지속되는 흐름이고단 한순간도 역사에 단절이 없는 것 한 시절 잘못된 자들이 설친다 하여우리 삶이 그리 쉽게 딸려갈 줄 아느냐함부로 좌지우지되는 역사인 줄 아느냐 비록 일시 어둠이 오고 악인이 와도그마져 우리 안의 선의 불꽃을 일깨우고잠든 정의의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이니 고통의 날에도 다시 해는 뜨고 꽃은 피고사람들은 울고 웃고 사랑하고 서로 격려하며아이들은 선한 기억을 물려받고 자랄 것이니 다만 우리는 좀더 유장한 마음으로성찰하고 정리하고 앞을 내다보면서다시 희망의 길을 찿아가는 것이다 기억하라, 세상 모든 것의 시작은지금 여기 나 하나로부터라는 것을

읽고 싶은 시 2024.08.23

들을 걸으며 / 조병화

들을 걸으며무심코 지나치는 들꽃처럼삼삼히 살아갈 수는 없을까​너와 내가 서로 같이사랑하던 것들도 미워하던 것들도작게 피어난 들꽃처럼​지나가는 바람에 산들산들삼삼히 흔들릴 수는 없을까눈에 보이는 거 지나가면 그 뿐​정들었던 사람아헤어짐을 아파하지 말자들꽃처럼, 들꽃처럼, 실로 들꽃처럼​지나가는 바람에 산들산들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삼삼히, 그저 삼삼히

읽고 싶은 시 2024.08.12

다시 산에 와서 / 나태주

세상에 그 흔한 눈물세상에 그 많은 이별들을내 모두 졸업하게 되는 날산으로 다시 와정정한 소나무 아래 터를 잡고둥그런 무덤으로 누워억새풀이나 기르며솔바람 소리나 들으며 앉아 있으리​멧새며 소쩍새 같은 것들이 와서 울어 주는 곳그들의 애인들꺼정 데불고 와서 지저귀는햇볕이 천년을 느을 고르게 비추는 곳쯤에 와서밤마다 내리는 이슬과 서리를 마다하지 않으리​내 이승에서 빚진 마음들을 모두 갚게 되는 날너를 사랑하는 마음까지백발로 졸업하게 되는 날갈꽃 핀 등성이 너머네가 웃으며 내게 온다 해도하나도 마음 설레일 것 없고하나도 네게 들려줄 얘기 이제 내게 없으니너를 안다고도또 모른다고도숫제 말하지 않으리​그 세상에 흔한 이별이며 눈물그리고 밤마다 오는 불면들을내 모두 졸업하게 되는 날산에 다시 와서싱그런 나무들 옆..

읽고 싶은 시 2024.08.01

관상觀想 휴가 / 박노해

장마 전에 난 정말 바쁘다감자알을 캐고 블루베리를 따고 오이를 따 소금에 절이고 별목련과 팥배나무를 캐다 심고 정원의 꽃나무들 가지치기를 하고수로를 파 물길을 내주고 나면 나의 7월은 끝, 휴가다  나의 여름휴가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관상觀想 휴가 문 앞에 “묵언 중입니다. 방문 사절. 미안.” 팻말을 내걸고 전화기도 뉴스도 끊고 테라스에 집필 책상과 의자를 치우고 낮고 편안한 의자를 놓고 기대앉아 묵연히 앞산을 바라보다 구름을 바라보다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는 걸 지켜보고 불볕에 이글거리는 들녘을 바라보다가  느닷없는 천둥번개와 빗금 쳐 쏟아지는 빗줄기에 한순간 세계가 변하는 서늘한 기운에 잠깐 우수수 하다가 겹겹진 구름 사이로 태양빛이 쏟아지며 커다란 무지개가 갈라진 세계를 잇는 ..

읽고 싶은 시 2024.07.16

삶에 대한 감사 / 박노해

​  하늘은 나에게 영웅의 면모를 주지 않으셨다그만한 키와 그만한 외모처럼 그만한 겸손을 지니고 살으라고 ​하늘은 나에게 고귀한 집안을 주지 않으셨다힘없고 가난한 자의 존엄으로 세계의 약자들을 빛내며 살아가라고 ​하늘은 나에게 신통력을 주지 않으셨다상처 받고 쓰러지고 깨어지면서 스스로 깨쳐가며 길이 되라고 ​하늘은 나에게 위대한 스승도 주지 않으셨다노동하는 민초들 속에서 지혜를 구하고 최후까지 정진하는 배움의 사람이 되라고 ​하늘은 나에게 희생과 노력으로 이루어낸 내 작은 성취마저 허물어 버리셨다낡은 것을 버리고 나날이 새로와지라고 ​하늘은 나에게 사람들이 탐낼만한 그 어떤 것도 주지 않으셨지만그 모든 씨앗이 담긴 삶을 다 주셨으니 무력한 사랑 하나 내게 주신 내 삶에 대한 감사를 바칩니다

읽고 싶은 시 2024.07.08

어우렁 더우렁 / 한용운

와서는 가고입고는 벗고잡으면 놓아야 할윤회의 소풍길에우린 어이타 인연 되었을꼬 봄날의 영화꿈 인듯 접고 너도 가고 나도 가야 할그 뻔한 길왜 왔나 싶어도 그래도...아니 왔다면 후회 했겠지! 노다지처럼 널린사랑 때문에 웃고가시처럼 주렁한미움 때문에 울어도 그래도그 소풍 아니면우리 어이 인연 맺어 졌으랴 한 세상 세 살다 갈 소풍 길 원 없이 울고 웃다가말똥 밭에 굴러도이승이 낫단 말빈 말 안되게 어우렁 더우렁그렇게 살다가보자

읽고 싶은 시 2024.06.28

바닷가에서 / 오세영

사는 길이 높고 가파르거든 바닷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아라. 아래로 아래로 흐는 물이 하나 되어 가득히 차오르는 수평선,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어둡고 막막하거든 바닷가 아득히 지는 일몰을 보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고이는 빛이 마침내 밝히는 여명,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자가 얻는 충족이 거기 있다. ​사는 길이 슬프고 외롭거든 바닷가가물가물 멀리 떠 있는 섬을 보아라. 홀로 견디는 것은 순결한 것,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스스로 자신을 감내하는 자의 의지가 거기 있다.

읽고 싶은 시 2024.06.18

무소부재(無所不在) / 구 상

아지랑이 낀 연당(蓮塘)에꿈나무 살포시 내려앉듯그 고요로 계십니까. 비 나리는 무주공산(無主空山)어둑이 진 유수(幽遂) 속에심오하게 계십니까. 산사(山寺) 뜰 파초(芭草) 그늘에한 포기 채송화모양애련(哀憐)스레 계십니까. 휘엉청 걸린 달 아래장독대가 지은 그림자이듯쓸쓸하게 계십니까. 청산(靑山)이 연장(連嶂)하여병풍처럼 둘렀는데높이 솟은 설봉(雪峰)인 듯어느 절정에 계십니까. 일월(日月)을 조응(照應)하여세월없이 흐르는 장강(長江)이듯유연(悠然)하게 계십니까. 상강(霜降) 아침나목(裸木) 가지에 펼쳐있는청열(淸烈) 안에 계십니까. 석양이 비낀황금 들판에 넘실거리는풍요 속에 계십니까. 삼동(三冬)에 뒤져놓은번열(煩熱) 식은 대지같이태초의 침묵을 안고 계십니까. 허허창창(虛虛蒼蒼)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무애(..

읽고 싶은 시 2024.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