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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은유 / 황동규

이제 무얼 더 안다 하랴. 저 맑은 어스름 속으로 막 지워지려 하는 무릎이 안개에 걸려 채 사라지지 않고 있는 저 조그만 간이역簡易驛, 안개 밖으로 잘못 얼굴 내민 코스모스 몇 송이 들켜서 공중에 떠있다. 한 줄기 철길이 숨죽이고 있다. 아 이 찰나 이 윤곽, 어떤 추억도 끼여들 수 없는, 새 한 마리 그림자처럼 느릿느릿 지나간다. 윤곽 모서리가 순간 예민해지고 눈 한번 감았다 뜨자 아 가벼운 지워짐! 이 가벼움을 나는 어떤 은유, 내 삶보다 더 X레이 선명한, 삶의 그릇 맑게 부신, 신선한 물음으로 받아들인다.

읽고 싶은 시 2014.03.31

정오의 바늘 / 신달자

내게 주어진 생의 요철을 단 한 번도 건너뛴 적이 없다 지층의 갖은 장애를 맨가슴으로 문지르며 온몸으로 문지르며 보이지 않는 속도로 오직 한 곳을 향해 문신하듯 땅의 무늬를 새기며 간다 드디어 도달한 산정 에귀유 뒤 미디* 배꼽과 배꼽이 포개지며 하나가 되는 하늘과 땅의 정점 반쪽과 반쪽이 온몸을 끌어 해진 살 다 녹아내리고 불멸의 한 가닥 뼈와 뼈로 만나는 정오의 바늘 잠시 껴안는 일 초의 미세한 시간을 뒤로 하고 일 초를 향해 다시 산정을 향해 요철 위를 문지르며 가는 어디까지라도 가야만 하는 내 마음의 바늘 나는 이 바닥을 기며 기며 너에게 닿으리 내 심장의 뼈로 오르고 올라 다시 아스라한 첨탑 그 정오의 한 찰나에 생을 묻으리. * Aiguile du Midi , 3842미터의 몽블랑 산정. ‘정..

읽고 싶은 시 2014.03.30

손에 대한 예의 / 정호승

가장 먼저 어머니의 손등에 입을 맞출 것 하늘 나는 새를 향해 손을 흔들 것 일 년에 한 번쯤은 흰 눈송이를 두 손에 고이 받을 것 들녘에 어리는 봄의 햇살은 손안에 살며시 쥐어볼 것 손바닥으로 풀잎의 뺨은 절대 때리지 말 것 장미의 목을 꺾지 말고 때로는 장미가시에 손가락을 찔릴 것 남을 향하거나 나를 향해서도 더 이상 손바닥을 비비지 말 것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지폐를 헤아리지 말고 눈물은 손등으로 훔치지 말 것 손이 멀리 여행 가방을 끌고 갈 때는 깊이 감사할 것 더 이상 손바닥에 못 박히지 말고 손에 피 묻히지 말고 손에 쥔 칼은 항상 바다에 버릴 것 손에 많은 것을 쥐고 있어도 한 손은 늘 비워둘 것 내 손이 먼저 빈손이 되어 다른 사람의 손을 자주 잡을 것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책을 쓰다듬고..

읽고 싶은 시 2014.03.28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신 / 도종환

청년시절 나는 공산주의의 이상에 빠졌습니다 젊은 나에게 정의와 평등은 거역할 수 없는 가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모형을 사회에 강제로 도입하기 위해 인간적 가치들을 버려야 한다면 그것 또한 폭력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데 내 생애 전체가 걸렸습니다 내가 자유의 복구를 시작하였지만 이 이데올로기 공백을 자본의 물결로 덮어버리는 걸 찬성하진 않습니다 자유도 사람과 자연과 사회의 원리와 통합하면서 착실하게 길 밞아나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 민중은 영감도 잃고 지도자도 잃고 변화에 참여할 마당도 잃었습니다 어려운 시대에 나는 농부였던 우리 부모가 내게 물려준 상식을 잊지 않았습니다 상식은 균형과 절제에 대한 감각이기도 합니다 흙에 대한 애정은 내게 굴하지 않는 정신과 지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소박함과 겸손함, 함께 노..

읽고 싶은 시 2014.03.27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읽고 싶은 시 2014.03.26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 황동규

내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은 꽃꽂이도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그냥 설거지일 뿐. 얼굴 붉은 사과 두알 식탁에 얌전히 앉혀두고 간장병과 기름병을 치우고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마음보다 더 시원하게, 접시와 컵, 수저와 잔들을 프라이팬을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하게 씻는 것. 겨울 비 잠시 그친 틈을 타 바다 쪽을 향해 우윳빛 창 조금 열어놓고, 우리 모르는 새 언덕 새파래지고 우리 모르는 새 저 샛노란 유채꽃 땅의 가슴 간지르기 시작했음을 알아내는 것, 이국異國 햇빛 속에서 겁 없이.

읽고 싶은 시 2014.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