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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한 노래 5 / 신달자

한 발자국만 가면 수심 깊은 강 이쯤에서 너의 이름을 부른다. 바람이 지나온 세월을 찢고 있다 아직은 다 죽지 못해서 내 피 섞인 시간들 울부짖으며 뜯기며 넝마가 되네. 바람은 내 충직한 하수인 흉물스러운 모습들 내 등 뒤로 날라 보냈는지 경건히 남은 목숨을 내어 놓고 수심 깊은 강에 먼저 마음이 걸어가는 고요한 명목의 시간 바람도 나와 같이 무릎 꿇는다. 하늘의 초승달 은빛 칼처럼 내려다본다. 내 무엇을 숨길 수 있으랴 어디를 간 들 바람을 피하며 혹은 하늘의 시선을 거스를 수 있느냐 내 이미 수심 깊은 강에 들어섰으니 그대여 나는 너의 이름을 부를 뿐.

읽고 싶은 시 2014.03.04

매화찬梅花讚 / 김진섭

나는 매화를 볼 때마다 항상 말할 수 없이 놀라운 감정에 붙들리고야 마는 것을 어찌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첫째로 그것은 추위를 타지 않고 구태여 한풍를 택해서 피기 때문이요, 둘째로 그것은 그럼으로써 초지상적初地上的인 비현세적非現世的인 인상을 내 마음속에 던져주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혹은 눈 가운데 완전히 동화同化된 매화를 보고, 혹은 찬 달 아래 처연悽然히 조응照應된 매화를 보게 될 때, 우리는 과연 매화가 사군자의 필두筆頭로 꼽히는 이유를 잘 알 수 있겠지만, 적설積雪과 한월寒月을 대비적對比的 배경으로 삼은 다음 에라야만 고요히 피는 이 꽃의 한없이 장엄하고 숭고한 기세에는, 친화親和한 동감同感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굴복감屈伏感을 우리는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매화는 확실히 춘풍이 태탕駘蕩한..

지구 껍질에서 / 황동규

오랜만에 시골서 묵는 밤 잠이 오지 않아 창문을 연다. 저수지 가득 피어오르는 밤안개 속에 새 우는 소리 그 소리 귀에 익지만 이름 잊었다. 소쩍센가, 자규센가, 아니면 안개 속에 길 잃은 외로운 가수歌手인가? 나도 자주 길을 잃었다. 때로는 사는 동네에서 길 잃고 헤맸다. 마음 구석구석 더듬어도 얼굴과 이름 떠오르지 않는다. 죽지 않고 지구 껍질에서 헤매다보면 다시 만날 날 있으리. 혹시 서로 못 알아보더라도 미소 머금고 지나가리.

읽고 싶은 시 2014.02.28

수선화에게 /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내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읽고 싶은 시 2014.02.27

달 밤 / 황동규

누가 와서 나를 부른다면 내 보여주리라 저 얼은 들판 위에 내리는 달빛을. 얼은 들판을 걸어가는 한 그림자를 지금까지 내 생각해 온 것은 모두 무엇인가. 친구 몇몇 친구 몇몇 그들에게는 이제 내 것 가운데 그중 외로움이 아닌 길을 보여주게 되리. 오랫동안 네 여며온 고의춤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두 팔 들고 얼음을 밞으며 갑자기 구름 개인 들판을 걸어갈 때 헐벗은 옷 가득히 받는 달빛 달빛.

읽고 싶은 시 2014.02.25

겨울밤 노래 / 황동규

조금이라도 남은 기쁨은 버리지 못하던 해 지는 언덕을 오를 때면 서로 잡고 웃던 해서 눈물겹던 사내여 오라. 우리 같이 흰 흙을 핥던 오후에는 배가 안 고프고 언덕에서 내려뵈던 깊은 황혼 캄캄하게 그 황혼 속을 달려가던 사내여 오라. 겨울날 빈터에 몰려오는 바람소리 그 밑에 엎드려 얼음으로 목을 축이고 얼어붙은 못 가에 등을 들판으로 돌리고 서서 못 속에 있는 우리의 마음을 바라 볼 때 몸과 함께 울던 우리의 옷을 보라.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손 그 떨리는 손에는 네 목을 잡고 머리칼 날리며 빙판에 서서 서로 마주 보며 네 목을 잡고 내 들려주리 쓰러지지 않았던 쓰러지지 않았던 사내의 웃음을. 어둡다 말하면 대답소리 들리는 쇳날을 만지면 살이 떨어지는 그런 떨리는 노래는 이제 우리에게. 서로 붙잡은 우..

읽고 싶은 시 2014.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