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옛날의 그집 / 박경리

윤소천 2014. 8. 22. 08:38

 

 

옛날의 그 집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 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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