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143

밤 / 고 은

나는 이 도시의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로수입니다. 다른 나무들은 산이나 들의 가장자리에서 밝은 햇빛과 맑은 공기를 받아들여 살아가지만 나는 가로수가 되어 도시의 먼지와 매연에 파묻혀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는 거리를 위하여 내가 맡은 일이 있으므로 그것을 보람으로 삼고 있습니다. 어떤 할아버지나 아주머니가 지나가다가 여름의 땡볕을 피해서 내 그늘 밑에 쉬고 있을 때는 내가 다른 때보다 더 잎사귀들을 펼쳐서 그늘을 넓게 만들기도 합니다. 밤이 오면 나는 이곳저곳의 네온사인이나 자동차들의 불빛 때문에 푹 쉴 수 없지만 그래도 한낮보다는 내 잎 속에 들어있는 것을 내뿜고 잠들 수 있어서 그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밤이 깊어가노라면 자동차도 많이 줄어들어서 이 도시가 언제 이다지도 얌전해졌는가 ..

수 필 / 피천득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에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이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화우미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진주 빛이다. 비단이라면 ..

존재의 신비 / 구 상

아파트 살이 내 서재 창가에는 몇 안 되는 화분에 끼여 잡초의 화반花盤이 하나 놓여 있다. 저 이름 모를 들풀들은 지지난 해, 봄 국화가 진자리에 제풀에 싹을 터서 제김에 자라 스러지고 나고 하며, 오늘에 이르는 것으로 때마다 풀들이 이것저것 바뀌는 것으로 보아서는, 제 자리 흙에서 묻어온 것도 있지만 바람을 타고 날아들어 온 씨앗도 더러 트는 성 싶다. 나는 난초보다도 또 어느 화분보다도 이 화분을 아끼는데, 저 잡초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고향의 들길이나 산기슭이나 바닷가를 거니는 느낌이어서, 한동안이나마 자신이나 세상살이의 번잡에서 해방되며 또 그 조그맣고 가녀린 꽃들을 바라볼 때는 그야말로 ‘솔로몬의 영화榮華’ 보다도 소중하고 진실하고 아름답다는 실감을 지닌다. 더욱이나 저 무명초無名草들이 서..

소외와 불안 / 구상

소외疎外란 말이 유행어처럼 쓰이어지고 있다. 그 어원을 라틴어에서 찾아보면, 타인화他人化 현상을 뜻한다고 한다. 즉 한 인간을 타인을 가지고도 대체할 수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다 아는 이야기지만, 인간이 스스로의 생활향상을 위해 만들고 기록한 기계나, 이념이나, 제도나, 조직이 거꾸로 인간 생활을 지배하기에 이르러 도리어 인간을 그 도구나 예속물로 만들어 버리려는 인간현상을 소외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저러한 인간의 정신이나 정서와 그 과학과 기술의 균형 상실에서 오는 소외현상 보다, 인간이 근원적 차원에서 지닌 소외의식을 좀 살펴볼까 한다. 시인 폴 끌로델은 그의 작품 의 머리말에서, “나는 여기 있다, 아무 것도 모르고 허청대고 있다. 아지 못할 소외속의 소외자,..

종교의 아름다움 / 황동규

인간이 종교 없이도 ‘종교적인’ 삶을 살 수 있느냐가 앞으로 인류생존의 열쇠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전 세계가 물신物神 숭배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20세기 끝머리인 오늘날 언젠가 한번 기웃거려볼만한 생각이다. 그러나 주위를 살펴보라. 이름 있는 목사치고 지나치게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지 않는 사람이 몇 있는가? 그들은 세금도 내지 않고 자녀 교육비는 따로 받고 있다.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얼마 전 화엄사가 마당을 돌로 깔았다가 다시 벗기는 공사를 했다. 돈이 다른 데로 새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시주받은 돈을 쓰는 데는 종단의 허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일부러 돌을 깔았다가 벗긴다는 말도 있었다. 가톨릭 천진암 성지에는 왜 그리 큰 성당을 짓고 있는가? 그곳엔 조그맣고 고졸古拙한 옛 성당을 남기고 서울이..

양잠설(養蠶說) / 윤오영

어느 촌 농가에서 하루 저녁 잔 적이 있다. 달은 훤히 밝은데, 어디서 비오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더러 물었더니 옆방에서 누에가 풀 먹는 소리였었다. 여러 누에가 어석어석 다투어서 뽕잎 먹는 소리가 마치 비오는 소리 같았다. 식욕이 왕성한 까닭이었다. 이때 뽕을 충분히 공급해 주어야 한다. 며칠을 먹고 나면 누에 체내에 지방질이 충만해서 피부가 긴장되고 윤택하여 엿빛을 띠게 된다. 그때부터 식욕이 감퇴한다. 이것을 최안기催眼期라고 한다. 그러다가 아주 단식을 해버린다. 그리고는 실을 토해서 제 몸을 고정시키고 고개만 들고 잔다. 이것을 누에가 한잠 잔다고 한다. 얼마 후에 탈피를 하고 고개를 든다. 이것을 기잠起蠶이라고 한다. 이때에 누에의 체질은 극도로 쇠약해서 보호에 특별히 주의를 해야 한다. 다시 ..

곶감과 수필 / 윤오영

소설을 밤(栗)에, 시를 복숭아에 비유한다면 수필은 곶감(乾柹)에 비유될 것이다. 밤나무에는 못 먹는 쭉정이가 열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밤나무라 하지, 쭉정나무라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보면 쭉정이도 밤이다. 복숭아에는 못 먹는 뙈기 복숭아가 열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역시 복숭아나무라 하고 뙈기나무라고는 하지 않는다. 즉 뙈기 복숭아도 또한 복숭아다. 그러나 감나무와 고욤나무는 똑같아 보이지만 감나무에는 감이 열리고 고욤나무에는 고욤이 열린다. 고욤과 감은 별개다. 소설이나 시는 잘 못 되어도 그 형태로 보아 소설이요 시지 다른 문학의 형태일 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 수필과 잡문은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 수필이 잘 되면 문학이요, 잘 못되면 잡문이란 말은 그 성격을 구별 못 한 데서 온 말이다. 아무..

손 / 반숙자

심부름 꾼이다. 좋은 일, 궂은일 가리지 않고 충직하게 소임을 다하는 심복이다. 어떤 주인을 만나는가에 따라 그 손의 사명이 달라지듯이 병고를 치유하는 인술仁術의 손이 있는가 하면 파괴와 살생을 일삼는 저주 받은 손도 있다. 기왕이면 좋은 손을 갖고 싶었다. 아름답고 우아하고 겸손한 그런 손을. 어느 가정이거나, 주부는 그 집의 손이어서 모든 것을 알아서 관리한다. 겨울 채비를 하느라고 이불에서 커튼까지 있는 대로 빨아 널고, 화초 분갈이 하고, 김장을 담그고 나면 내 손은 엉망이 되고 만다. 조심성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일이 서투른 탓인지 손이 성할 날이 없으니 민망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손등은 생채기투성이고 손가락은 군데군데 칼자국이 스쳐 가관이다. 낮에는 바빠서 별로 모르다가 밤에 잠자리에 들면..

내 벗이 몇 인가 하니 / 구 활

​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란 그 말씀 너머에 자연이 존재한다. 무슨 말이냐하면 세파의 인정에 넌덜머리가 난 사람들은 더 이상 '사회적 동물'이기를 포기하고 도망치듯 자연 속으로 숨어들어 은자가 된다는 말이다. 고향을 포함하여 넓은 의미의 자연은 어머니의 자궁과 가장 밀접하게 닮아 있기 때문에 일상이 고단한 이들은 자연의 품에 안겨야 비로소 안정과 휴식을 얻을 수 있다. 몇 푼의 봉록이 걸려있는 관직생활에 심신이 피로해진 도연명은 불후의 명작인 '귀거래사'를 읊으며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회재 이언적도 김안로와의 권력투쟁에 밀려 안강 자옥산 기슭에 독락당을 짓고 7년이나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그리고 고산 윤선도도 젊은 패기에 푸른 꿈이 있었지만 당쟁의 세력 다툼이 싫어 보길도로 들어가 자연 속으로 회귀..

무소유의 극치 / 황동규

​ 소유와 소유욕이 얽히고 설킨 세상에 살다 보면, 무소유의 세계가 그리워지고, 무소유의 삶을 온몸으로 살다 간 선인들이 그리워지곤 한다. 우리나라에도 원효나 김시습 같은 무소유의 멋쟁이 구걸승이나 방랑자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무리지어 살았던 시기와 장소는 당나라 후기와 송나라 초기의 중국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 한산(寒山)이나 방거사(龐居士) 같은 명품은 말할 것도 없고 오가(五家) 칠종(七宗)의 거의 모든 선승들이 소유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것이다. 선승들의 이야기는 거의 다 개성 있는 빛을 지니고 있다. ]그 많은 독특한 빛들 속에 가장 강렬한 것 가운데 하나는 조주(趙州)스님과 투자(投子) 스님 사이의 첫 만남 장면이다. 당시 조주는 맨몸으로 방랑을 하고 있었고 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