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144

부단히 떠나야 한다 / 구양근

새벽운동을 시작한 지가 꽤 오래 되었다. 6시쯤 일어나 산책길 중간에 있는 화원까지 속보를 한 뒤, 강변둔치까지 가서 운동기구를 이것저것 작동해 본다. 그리고는 다시 속보로 집에까지 돌아오는데 시간은 1시간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이 간단한 반복운동을 올해로 27년째 하고 있다. 강변둔치의 운동기구 중에는 25도의 경사로 거꾸로 눕는 기구가 3개 있다. 그 중 하나를 차지하고 거꾸로 누워서 창공을 올려다보는 것은 머리를 비우는 무념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매년 10월 초순이 되면 하늘 저 멀리에서 항상 낯익은 장면 하나가 눈에 띈다. 티끌인가 싶어 자세히 보면 한 무더기의 새떼가 푸른 하늘을 배경삼아 흰 구름 사이로 보일락 말락 남쪽으로 남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날씨가 싸늘해지면 몇 분 간..

풍란 / 이병기

나는 난(蘭)을 기른 지 20여 년, 20여 종으로 30여 분 까지 두었다. 동네 사람들은 나의 집을 화초(花草) 집이라기도 하고 난초병원(蘭草病院)이라기도 하였다. 화초 가운데 난이 가장 기르기 어렵다.난을 달라는 이는 많으나, 잘 기르는 이는 드물다. 난을 나누어 가면 죽이지 않으면 병을 내는 것이다. 난은 모래와 물로 산다. 거름을 잘못하면 죽든지 병이 나든지 한다. 그리고 볕도 아침 저녁 외에는 아니 쬐어야 한다. 적어도 10년 이상 길러 보고야 그 미립이 난다 하는 건, 첫째 물 줄 줄을 알고, 둘째 거름 줄 줄을 알고, 셋째 위치를 막아 줄 둘을 알아야 한다. 조금만 촉랭(觸冷)해도 감기가 들고 뿌리가 얼면 바로 죽는다. 이전 서울 계동 홍술햇골에서 살 때 일이었다. 휘문 중학교의 교편을 잡고..

쓰고 싶고 읽고 싶은 글 / 윤오영

옛 사람이 높은 선비의 맑은 향기를 그리려 하되, 향기가 형태로 없기로 난(蘭)을 그렸던 것이다. 아리따운 여인의 빙옥(氷玉)같은 심정을 그리려 하되, 형태가 없으므로 매화(梅花)를 그렸던 것이다. 붓에 먹을 듬뿍 찍어 한 폭 대(竹)를 그리면, 늠름한 장부, 불굴의 기개가 서릿발 같고, 다시 붓을 바꾸어 한 폭을 그리면 소슬(蕭瑟)한 바람이 상강의 넋을 실어 오는 듯 했다. 갈대를 그리면 가을이 오고, 들을 그리면 고박(古樸)한 음향이 그윽하니, 신기(神技)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기에 예술인 것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결코 독자(讀者)를 저버리지 않는다. 글을 잘 읽는 사람 또한 작자(作者)를 저버리지 않는다. 여기에 작자와 독자 사이에 애틋한 사랑이 맺어진다. 그 사랑이란 무엇인가. 시대(時代)..

양지의 꿈 / 천경자

아침나절에 눈이 살풋이 내리더니 날씨가 포근하고 어느덧 하늘은 코발트 그레이로 개며 햇볕이 쬔다. 오랫동안 난로의 온기에 생명을 의지해 오던 고무나무와 포인세티아 화분을 햇볕 드는 곳으로 옮겨 주었다. 포인세티아는 잎이 다 떨어진 채 후리후리한 키에 빨간 꽃만 이고 있는데 바람이 불면 바람개비가 되어 뱅뱅 돌 것만 같다. 뜰의 장미나무는 뿌리 언저리에 덮어 준 노란 왕겨와 그 위에 아직 녹지 않아 힐낏힐낏 햇볕을 받고 흰 빛깔로 반짝거리는 눈을 이불 삼아, 잠자고 있는 듯 섰어도 어딘지 봄 냄새를 풍긴다. 좁은 마당 한가운데 큰 고무 대야를 내다 놓고, 더운 물을 붓고 가루비누를 풀어 빨래를 했다. 늘 방구석에 화분처럼 앉아서 그림을 그리거나 생각에 잠겨만 있다가 이렇게 포근한 양지에서 빨래를 주무르니 ..

수필 읽으면서 느끼는 것 / 윤모촌

새로 나온 수필집이 손에 들리면, 장애를 받는 시력을 불구하고 책을 펴든다. 먼저 시선이 가는 곳이 머리말인데, 이 머리말을 다 읽기도 전에 책을 놓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가하면, 머리말에 이끌려 본문까지 읽게 되는 것도 있다. 수필집 머리말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한 편의 수필처럼 쓰는 글이 아니고, 어떻게 해서 책이 나오게 됐다는 독자에게 예비적으로 이해를 돕는 실용문이다. 그런데 온갖 수식어로 장황하게 꾸며 쓴 것이 있어 읽어나갈 수가 없고, 내용도 보지 않아 알만 하겠다 해서 책을 놓고 만다. 본문을 읽어보면 과연 그러해서, 한 편을 다 읽지도 못하고 책을 덮게 한다. 본문의 경우 책을 놓게 하는 것이 서두의 부분인데, 이를테면 계절에 관한 것일 때, 두어 문장이면 계절감각은 다 나타나서, ..

설야 산책(雪夜散策) / 노천명

저녁을 먹고 나니 퍼뜩퍼뜩 문발이 날린다. 나는 갑자기 나가고 싶은 유혹(誘惑)에 눌린다. 목도리를 머리까지 푹 눌러 쓰고 기어이 나서고야 말았다. 나는 이 밤에 뉘 집을 찾고 싶지는 않다. 어느 친구를 만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이 눈을 맞으며 한없이 걷는 것이 오직 내게 필요한 휴식일 것 같다. 끝없이 이렇게 눈을 맞으며 걸어가고 싶다. 이 무슨 저 북구(北歐) 노르웨이에서 잡혀 온 처녀의 향수(鄕愁)이랴. 눈이 내리는 밤은 내가 성찬을 받는 밤이다. 눈이 제법 대지를 희게 덮었고, 내 신바닥이 땅 위에 잠깐 미끄럽다. 숱한 사람들이 나늘 지나치고 내가 또한 그들을 지나치건만, 내 어인 일로 저 시베리아의 눈 오는 벌판을 혼자 걸어가고 있는 것만 같으냐. 가로등이 휘날리는 눈을 찬란하게 반사시킬 때마..

숨어 있는 나무 / 이정림

이따금 나는 몇 해 전에 오대산(五臺山) 정상에서 본 아름드리나무들을 떠올릴 때가 있다. 산악회원을 따라 오랜만에 나선 산행에서 우연하게 그 나무들을 보았을 때, 나는 그 웅장한 모습에 그만 압도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산을 오르면서 줄곧 크고 작은 나무들을 스쳐 지나가면서도, 나무에 대한 특별한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정봉(頂峰)을 지척에 둔 정상에서 숨을 토해 내느라 허리를 펴는 순간, 그 나무들은 나를 맞이하듯 내 앞에 우뚝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그 뜻밖의 거목들 앞에 잠시 놀란 가슴으로 서 있었다. 그만큼 그 깊은 곳에 그런 거목이 숨어 있는 듯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충격 같은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서서히 어떤 알 수 없는 감동으로 내 마음에..

한은 보랏빛 / 천경자

동네 친척 집에 경사가 나 타관에서 새색시가 온 날이면, 어머니 장롱 속에 들어 있던 남색과 적색 치마가 꺼내어져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내가 본 어느 새색시는 단속곳 위에 남치마를 두른 다음 그 위에 붉은 치마를 다시 두르고, 노랑 저고리를 맞춰 입고 어디선가 빌려 온 원삼 족도리를 걸고 차일 밑에서 폐백을 올렸다. 모란 무늬가 띄엄띄엄 새겨진 갑사 치마는 속이 비쳐 보여서 멀리서 보면 남빛과 붉은 빛이 합쳐져 깊은 샘 속에 깔린 신비한 보랏빛으로 보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보랏빛은 어딘지 한과 인연이 있는 빛깔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어머니의 잘롱 속에서 들려 나갔다 돌아온 치마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백년가약을 맺던 날 입었던 치마였다. 앞 이마 위의 머리가 유독 허옇게 센 팔순에..

사는 보람에 대하여 / 미우라 아야꼬

어느 심포지움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그때 주제(主題)는 노인의 사는 보람에 대해서였다. 여러 가지 좋은 의견들이 많았는데,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사는 보람에 대한 나의 평소의 생각들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먼저 ‘노인의 사는 보람’과 ‘젊은이들의 사는 보람’은 과연 다른 것인지? 나는 이 문제에 대해 항상 의문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노인에게는 노인의 사는 보람이 있고, 젊은이에게는 젊은이의 사는 보람이 있어 마땅한 것이라고. 그런 것일까? 나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노인과 젊은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알 수 없는 것이다. 분명히 노인과 젊은이 사이에는 표면적인 차이는 있다. 노인은 체력(體力)이 떨어지면서 모든 일에서 손을 떼게 된다. 그러다가 노쇠해진 다음에는 노인병(老人病)..

침묵의 눈 / 법정

선가에 '목격전수(目擊傳授)' 라는 말이 있다. 입 벌려 말하지 않고 눈끼리 마주칠 때 전할 것을 전해준다는 뜻이다. 사람끼리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것도 사실은 언어 이전의 눈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말은 설명하고 해설하고, 또 주석을 달아야 하는 번거로움과 시끄러움이 따르지만, 눈은 그럴 필요가 없다. 마주 보면 이내 알아차릴 수 있고, 마음속까지도 훤히 들여다 볼 수가 있다. 그래서 가까운 사이는 소리내는 말 보다도 오희려 침묵의 눈으로 뜻을 전하고 받아드린다. 그렇다 하더라도 눈은 어디까지나 '창문'에 지나지 않는다.사물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은 눈이 아니라 마음이다. 마음의 빛이 눈으로 나타날 뿐, 그렇기 때문에 창문인 그 눈을 통해 우리들은 그 사람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