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밤 / 고 은

윤소천 2023. 11. 21. 11:55

                    

 

 

  나는 이 도시의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로수입니다. 다른 나무들은 산이나 들의 가장자리에서

밝은 햇빛과 맑은 공기를 받아들여 살아가지만

나는 가로수가 되어 도시의 먼지와 매연에 파묻혀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는 거리를 위하여 내가 맡은

일이 있으므로 그것을 보람으로 삼고 있습니다. 어떤 할아버지나

아주머니가 지나가다가 여름의 땡볕을 피해서 내 그늘 밑에

쉬고 있을 때는 내가 다른 때보다 더 잎사귀들을 펼쳐서

그늘을 넓게 만들기도 합니다.

 

밤이 오면 나는 이곳저곳의 네온사인이나 자동차들의

불빛 때문에 푹 쉴 수 없지만 그래도 한낮보다는 내 잎 속에

들어있는 것을 내뿜고 잠들 수 있어서 그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밤이 깊어가노라면 자동차도 많이 줄어들어서 이 도시가

 언제 이다지도 얌전해졌는가 하고 어리벙벙한 때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밤이야말로 낮에 찌들고 때 묻은 지친 몸과

마음을 스스로 펴게 되고 씻어내게 되며 지친 것을 풀 수 있는

 더없이 거룩한 시간입니다.

 

사람들도 낮의 바쁜 일이나 고된 일에서 벗어나

깊은 잠으로 그 자신들을 다음 날 새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밤은 어머니라고 노래한 적도 있는지

모릅니다. 밤은 어머니처럼 모든 것을 그 품에 안아 새로운 힘을

낳아주는 어둠이므로 그것은 밝은 낮과 함께 이 세상을 이어가는

바탕입니다. 낮이 아버지라면 밤은 어머니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밤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깊은 밤까지 텔레비전을 보고 비디오의 화면에

눈을 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밤 0시가 되어도 부엉이나

소쩍새처럼 잠들 줄 모르고 지내기 일쑤입니다.

무엇인가 깊이 생각해보거나 하루의 일을 마음속으로 가늠하여

살피는 일 따위에는 아무런 뜻도 두지 않고 자기 자신이

아닌 상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밤을 통해서 새로 태어나기 위한

그 말 없는 시간을 가지는 일 따위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침이 오면 부랴부랴 핸드폰이나 삐삐 따위를 가지고

다니며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게 이리 뛰고 저리 뛰기 시작합니다.

자리를 꽉 매운 자동차들은 서로 앞서 가려고 빵빵 경적을

울려댑니다. 그러다가 교통사고가 생겨 사람의

목숨이 대번에 끊어지기도 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의 하루하루를 지켜보며 지난날 사람들이

느릿느릿 듬성듬성 보도 위를 걸어가는 시절을 떠올립니다.

사람이 스스로 돌아보거나 닦는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스스로 쉬는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오늘이라면 이 오늘은 꼭

고쳐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길을 가다가 한동안

서 있는 모습이 그립습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읽고 싶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 산상설교 / 최인호  (0) 2023.11.21
하늘잠자리 / 손광성  (0) 2023.11.21
수 필 / 피천득  (0) 2023.11.05
존재의 신비 / 구 상  (0) 2023.09.30
소외와 불안 / 구상  (0) 2023.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