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와 소유욕이 얽히고 설킨 세상에 살다 보면,
무소유의 세계가 그리워지고, 무소유의 삶을 온몸으로 살다 간 선인들이
그리워지곤 한다. 우리나라에도 원효나 김시습 같은 무소유의 멋쟁이
구걸승이나 방랑자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무리지어
살았던 시기와 장소는 당나라 후기와 송나라 초기의 중국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 한산(寒山)이나 방거사(龐居士) 같은 명품은 말할
것도 없고 오가(五家) 칠종(七宗)의 거의 모든 선승들이 소유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것이다.
선승들의 이야기는 거의 다 개성 있는 빛을 지니고 있다.
]그 많은 독특한 빛들 속에 가장 강렬한 것 가운데 하나는 조주(趙州)스님과
투자(投子) 스님 사이의 첫 만남 장면이다. 당시 조주는 맨몸으로 방랑을
하고 있었고 투자는 기름을 짜다 팔아 근근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조주가
투자의 명성을 듣고 투자가 사는투자산(山) 가까이 갔을 때 길에서
둘이 만났다. 서로 얼굴은 모르지만 조주는 상대가 투자라고 짐작하고
“혹 당신 투자 스님 아니시오?” 하고 물었다. 투자는 대답 대신 “나는 거리로
장 보러 가는데 보시 좀 하지 않겠소?” 하고는 휙 지나가버렸다.
조주는 혼자 먼저 투자산에 올라가 투자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투자가 기름단지를 들고 돌아왔다. “투자, 투자 하고 꽤들
떠들어대는데, 정작 와보니 하찮은 기름 장수로군.” 투자가
“당신은 기름 단지에 정신이 팔려 나를 못 보는군.” 하고 응수하자,
조주는 “그럼 투자의 실체를 보여주게.” 했다. 투자는 느닷없이 조주 앞에
기름 단지를 불쑥 내밀며 “기름이오. 기름! 기름 안사겠소?” 했다.
얼마나 천진무구하고 멋진 장면인가! 그야말로 물질적인
세상일을 벗어난 정신의 임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순간인 것이다.
이런 중국의 선승들의 세계를 엿보다가 어느덧 나는 선이
중국인의 독특한 창조물이라고 생각하게끔 되었다. 그런데 선도
불교와 마찬가지로 인도의 산물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 것은 금년 <내셔날 지오그래픽> 5월호에 실린 다음 글을
읽고 부터이다. 리포터 하비 아든(Harvey Arden)은
캘커타에서 뉴델리를 잇는 수 천리에 이르는 인도의 '대동맥 도로
(The Grand Trunk Road)'를 취재하다가 허리감개만 감고
걸어오는 수염 기른 젊은이 하나를 만난다. 그의 소지품이라고는
목에 걸친 헝겊 백, 나무 지팡이, 그리고 먹을
것을 비는 알루미늄 그릇뿐이었다.
아든은 사진을 찍어도 좋으냐 묻고는 사진을 찍었다.
돈을 주려하자 젊은이는 완강히 거부했다. “난 돈에 손도 대지 않소.
돈은 고통만 주지요. 빼앗기지 않으려고 싸우기도 해야지요.
내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이 세상의 평화뿐이오.” 아든은 카메라 백을
뒤져서 전지를 꺼내, 밤길 가는 데 도움이 되겠지 하고 생각하며,
젊은이의 헝겊 백에 넣어주었다. 당혹한 빛을 띠고 젊은이는 자리를 떴다.
좀 가다가 그는 백에서 무언가 꺼내 던졌다. 물질의 풍요가 편리는
제공하지만 동시에 스스럼없이 속박도 준다는 것을
논리가 아닌 섬광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이제 문명의 이기 없이는 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하기는 물질의 소유 속에서도 빛나는 정신이어야 진정한 가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가치를 세우기 위해서는, 때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이 과연 의미 있는 삶인가 물어야 하며, 때로 소유에
속박되어 있는 정신을 풀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조주나 투자
그리고 무명(無名)의 인도인 젊은이가, 그리고 수많은 고승과 뜻 높은
수도자들이, 속박을 푸는 기호를 어깨너머로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
( 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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