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놀이 곱게 물든 서녘 하늘에 갈가마귀 떼가 까맣게 날고 있었다. 어린 시절 이런 풍경은 문학이나 철학이나 또는 정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저 아름답고 순수한 원시의 자연 풍경 그대로일 뿐이었다. 봄이면 채마밭에 장다리꽃이 노랗게 피지 않아도 평화로웠고, 여름이면 이 빠진 개가 부엌문 옆에 늘어져 낮잠을 자고 있지 않아도 한가로웠다. 아무런 다툴 것도 괴로운 것도 없는, 우러르면 눈이 시린 하늘이 있을 뿐이었다. 며칠 전 나는 부모님의 산소에 가서 벌초를 하고 돌아왔다. 올해는 비가 많아서인지 잡풀이 봉분을 엉성하게 덮고 있었고 무덤 한 쪽 모서리가 움푹 패어 있었다. 그리고 동생 무덤에는 아카시아가 뿌리를 박고 있었다. 아무리 독한 약을 써도 끄떡없었다. “괭이로 뿌리째 파버려야 되겠구먼”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