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의 수필 30

솟대의 꿈 / 윤소천

우리 집 베란다 앞 화단 가장자리, 소나무와 능수단풍 사이에는 어린이 키만 한 솟대가 서 있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새를 머리에 인 솟대가 나를 먼저 반겨주고는 하는데, 집 마당에 솟대가 들어서게 된 사연은 이렇다. 집을 신축하면서 화목보일러와 기름보일러를 함께 설치했는데, 산 아래 마을인지라 난방은 화목으로 하고 더운 물을 쓸 때는 기름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산에서 나무를 해오는 일이 쉽지 않았다. 산림 가꾸기 사업으로 벌목과 가지치기한 나무가 지천이지만 자르고 가져오는 일이 힘들었다. 나무를 길가로 옮기는데 지게가 아니면 안 되어 땔감이 눈앞에 있어도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이런 처지를 아는 지인으로부터 아파트단지에 땔감으로 쓸 만한 폐목이 있으니 와 보라는 연락이..

소천의 수필 2016.06.26

봄이 오는 길목에서 / 윤소천

봄이 오는 길목에서 남쪽 바닷가에 사는 친지로 부터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 뜰에 나섰다. 매화와 산수유 개나리의 꽃눈이 어느새 또렷해져 언제라도 꽃 문을 열 것 같은 모습이다. 입춘과 우수가 지났지만 영하에 머무르는 날씨로 미처 계절을 잊고 지낸 것이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면 새벽닭 울음소리, 날이 밝아오며 지저귀는 새소리에서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마을 옆 샛강에서 무리를 지어 겨울을 나던 청둥오리는 벌써 새로운 둥지를 찾아 길을 떠났다. 지난 세월 나는 무리하게 벌인 사업을 어렵게 정리하고 자신에 대한 회한과 좌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혹한의 어둡고 긴 인생의 터널을 가까스로 지나왔다. ​이제 계곡의 얼음이 풀리면 수선과 진달래가 활짝 피는 봄이 올 것이다. 봄을 사랑의 계절이라고 ..

소천의 수필 2016.03.01

가을 뜨락에서 / 윤소천

며칠째 새벽 공기가 차갑더니 엊그제 이르게 첫 서리가 내렸다. 이른 아침 차를 운행하려 앞 유리에 얼어붙은 서릿발을 긁어내는데 손가락이 얼얼하게 시려 정신이 번쩍 나는 듯 했다. 오후에는 시내에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증암천 수변 공원에 차를 대고 갈대밭 사이를 걷다 여기저기 피어있는 코스모스 수레국화 달맞이꽃 씨앗을 받아왔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마당의 백일홍 분꽃 금잔화 루드베키아 씨앗을 편지봉투에 담아 날짜를 적고 현관 서랍장에 넣으니 올 가을 꽃씨는 갈무리 된 셈이 되었다. 마당 귀퉁이에 서있는 해바라기는 작은 쟁반만 한 꽃이 까맣게 익은 씨앗을 품고 스스로의 무게에 고개를 숙였다. 해바라기를 볼 때면 끓어오르는 열정을 온몸으로 태우다 간 고호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가 더 살아 장년의 내 나이가 되었..

소천의 수필 2015.12.06

뜰의 낙엽을 모으면서 / 윤소천

이른 아침 일어나 창문을 열면, 차가운 느낌의 선뜩한 기운이 오히려 맑고 신선하게 느껴져, 의식이 한결 투명해짐을 느끼는 요즈음이다. 창 밖 메마른 바람에 흔들리다 한잎 두잎 떨어져 뜰에 구르는 낙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아무리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을이 우수의 계절이고 사색의 계절임을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다보면 나의 그림자이기도한 내 사유의 속 뜰도 무심히 들여다보게 되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무서리가 내리면, 나무들은 남은 잎들마저 다 떨쳐버리고 빈 몸으로 서 있을 것이다. 엊그제는 문학회의 가을 세미나가 한려수도 여수에서 있었다. 승주 선암사에서 만나, 가을비를 맞으며 단풍이 절정인 조계산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절을 돌아보고, 여수로 가 행사 후 일박을 한 뒤, 오전에는..

소천의 수필 2013.11.22

겨울 이야기 / 윤소천

꽃 한 포기 볼 수 없는 겨울의 텅 빈 뜰의 정경은 언제나 황량하고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추위를 견디며 나와 함께 겨울을 나는 나무들, 지난 늦가을 한 잎 두 잎 잎을 떨쳐내더니 이제는 차가운 겨울하늘 아래 알몸으로 매서운 북풍과 눈보라를 맞으며 저마다 홀로 서서 추위를 천연스레 이겨내고 있다. 이들의 모습을 유심이 보고 있으면 그 인내와 견고한 모습에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나무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면 단풍은 벌써부터 그 빈자리에 틔울 싹을 삐쭉이 마련하고 있고, 목련은 버들강아지 같은 꽃망울을, 매화는 어느새 꽃눈을 달고 있다.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무들이 말없이 찬란한 새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단풍의 연두색 여린 잎, 그리고 매화의 은은한 향기, 목련꽃의 우아하고 기품 있는 모습..

소천의 수필 2013.11.22

자연은 늘 새로움으로 살아있다 / 윤소천

무서리에도 꽃을 피우던 국화가 마지막 지고 나니 누렇게 바랜 잔디위, ​쌓인 낙엽만이 바스락대는 뜰이 황량하기만하다. 제 소임을 다하고 빈 가지로 서 있는 나무들은 자연의 순환를 따라 이제 뿌리로 내려 앉아 새로운 봄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 겨울 근처 산에서 옮겨 심은 담 밑 산죽과 소나무 만이 푸르러 한층 돋보인다. 어제는 한쪽에 모아 심어놓은 산죽을 나누어 대문 양편 잘 보이는 곳에 옮겨 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봄이 엊그제 같고 신록이 눈부시어 풍성했던 여름 그리고 색색의 단풍으로 ​ 물들은 가을이 엊그제인 듯한데, 벌써 겨울의 한복판에 와있다. 자연은 이렇게 한 순간도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새날을 연다. 이 자연 안에서 숨을 쉬며 사는 우리 인간의 삶 또한 이와 ..

소천의 수필 2013.11.22

싱그러운 아침 / 윤소천

창문을 열면 신선한 공기가 산뜻하게 느껴지는 9월도 중순에 접어든 이른 새벽이다. 잠에서 깨어나면 간단히 세안을 하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운 다음 스탠드의 불을 끈다. 이러고 나면 예스러운 분위기에 촛불 위로 꽃 향이 번지면서 한결 아늑해지고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매일 이 시간이면 하는 일상의 일이지만, 나에게 주어진 오늘을 위해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새 아침을 연다. 이른 아침 맨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길 건너 산자락 대나무 숲에 둥지를 튼 새들이다. 새들은 새벽잠도 없는지 하늘이 열리자 어느새 지저귄다. 수다스럽기도 하지만, 그 맑고 즐거운 새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함께 살아 있다는 생동감에 새삼 힘이 솟는다. 어두운 밤의 긴 터널을 지나 다시 하루를 여는 아침 햇살은 언제나 눈부시고 아름답다...

소천의 수필 2013.11.19

차를 마시며 / 윤소천

차를 마시며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고 생활하여 오다, 근교 시골 마을로 오게 된지 어느덧 십여 년이 훌쩍 지났다. 그즈음이 국가적으로 모두가 어려웠던 시기였는데 나도 하던 사업이 막바지에 이르러 정리를 하게 된 것이다. 이때에 부모님은 평소 원하시던 대로 넓고 공기 좋은 곳에서 자식들과 떨어져 몇 해를 사셨는데, 이 어려움 중에 아버님이 별세하시고, 어머님이 손자들을 떠맡으시면서 다시 살림을 합치게 된 것이다. 집안의 장손으로 면목은 고사하고 가까스로 살아남아 쥐구멍에라도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시골 생활이 처음인데다 그 때의 심정은 피신이라도 온 기분이어서 하루하루가 말 그대로 가시방석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간들도 한해 두해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가라앉고 추스러져 일거리를 찾으면서 그런데로 자리가 ..

소천의 수필 2013.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