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의 수필 30

괴정(槐亭)마을의 회화나무

전남 보성군 복내면 괴정(槐亭)마을은 칠원윤씨(漆原尹氏) 집성촌으로 나의 선조가 수백 년 터를 이루고 살아온 곳이다. 선친 생전에 자주 들르곤했던 덕암제(德菴齊)를 오랜만에 찾았는데 선친이 태어난 이곳 이정표가유정리에서 옛 이름인 괴정(槐亭)마을로 바뀌어있었다. 가승(家乘)을 만들면서 16대 선조의 아호가 *괴정(槐亭)임을알고 있었는데 이제 그 유래를 알게되었다. 태어난지명을 아호로쓴 것이다. 마을 어귀 회화나무가 있는집은 집안의 대모님이 살고 있는데,오백 년 된 나무로 임금이 벼슬을한 우리 선조에게 하사하여 심은나무라 한다. 이 회화나무의 정기를받아서일까. 이 댁 이찬식 윤창숙내외분은 우리나라 삼베명인이다.뒤안 대숲에 대나무보다 더 높게 자란회화나무 한 그루가 까치둥지를 품고 서있다. 아침에 울면 기쁜..

소천의 수필 2017.11.20

소쇄원(瀟灑園)에서 / 윤소천

내가 살고있는 담양 창평에서가까운 가사문학관 주변은 식영정과환벽당 그리고 소쇄원이 지척에어우러져 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길 건너 옛 창암촌에 들어선다.작은 다리를 건너 좌우로 쭉쭉 뻗어높게 자란 왕대 숲 사잇길로들어서면 대숲 향이 풍겨온다.​여기에서 돌계단을 따라내려가면 광풍각光風閣으로 가는외나무다리를 만난다. 이 다리에서바라보는 원림園林의 정경이가장 아름답다. 광풍각 아래에는이끼 낀 바위틈으로 계곡물이 흐르고,건너편 연못에서 대나무 홈통을타고 떨어지는 물줄기가 시원하다.광풍각 뒤로 산수유와 배롱나무고목이 있는 협문을 지나면제월당霽月堂이다.​이곳 원림의 중심이라 할 수있는 광풍각과 제월당은 중국 송나라시인이었던 황정견黃庭堅이애련설愛蓮說을 쓴 주무숙周茂叔의사람됨이 광풍제월光風霽月이라한 데서 비롯한 말이..

소천의 수필 2017.03.11

아리랑이 흐르는 증암천甑巖川 / 윤소천

증암천의 사계는 싱그럽고풍성하다.나무와 새, 물오리와 백로그리고 이따금 씩 수면위로 뛰어오르는 물고기들...강가에는 세월의무게만큼 둥글게 닳은 돌들과모래톱이 군데군데 모습을 드러내고있다. 물안개가 걷히자 말갛게씻긴 갈대숲이 햇살을 받아 반쩍이며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무등산 북쪽 산록에서 발원한증암천은 독수정獨守亭과 소쇄원瀟灑園 계당溪堂의 실계천 그리고 원효계곡과 성산星山의 물이 합수하여 영산강으로 흐른다. 무등산 자락의 경관이 뛰어난여기 가사문학관 일대가 우리나라가사문학의 산실이다. 푸른 숲에 둘러싸여 있는 환벽당環碧堂과 아래 용소는 환벽당을 세운 김윤제가 어린 정철을 만나 손녀 사위를 삼은 곳이고, 그림자가 쉬어간다는식영정息影亭은 송강松江 정철이 사미인곡思美人曲 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을 지은 송강정松江亭과..

소천의 수필 2016.07.31

우리 ‘다리’ / 윤소천

아침이면 마을 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산책 한다. 겨울로 접어들어서는 햇볕이 있는 오후에 집을 나선다. 오솔길로 접어들어 쉼터 참나무숲에 들어서면 우리 ‘다리’가 떠오른다. ‘다리’는 십여 년을 함께 지낸 우리 개의 이름이다.  둘째 딸이 유치원에 다닐 무렵이었다. 나들이하고 돌아오는 길에 친구 집에 들렀는데, 아이는 애완견을 보자 예쁘다며 쓰다듬고 안아주더니 어느새 친해져서 장난하며 놀았다.그리고는 집에 데려가자고 떼를 썼다.  그 후 한동안이 지났는데, 친구네가 어미가 새끼를 낳았다며 강아지 한 마리를 ‘다리’라는 이름을 지어 보내왔다. 친구 부인은 아내와도 친구여서 우리는 안팎으로 친구 사이였다. 잘생긴 제 어미를 빼닮은 귀여운 갈색 ‘푸들’로 아이는 강아지를 덥석 안으며 좋아했다.  그때 우리는 ..

소천의 수필 2016.07.13

매실을 따며 / 윤소천

눈 속에서 꽃샘추위를 이기고 마침내 꽃 문을 틔운 매화를 보았을 때 신비롭기만 했다. 매화가 한창일 무렵에 매화 밭에 자주 가보았다. 꽃그늘에 앉아 매향에 취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꽃 가까이 다가가면나도 모르게 ‘그 매서운추위를 다 이겨내고 너 참 대단하기도 하구나.’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가지마다 무성한 잎 사이로 튼실한 열매를 맺었다. 살이 오른 청록색 매실에서는 싱싱함이 넘쳐나 빛이 난다. 유심히 들여다 보면 알알이 맺혀있는 모습이 마치 연둣빛 보석 같다. 수확철인 요즈음 아내와 함께 햇볕이 따가운 한낮을 피해 해거름에 매실을 딴다.아래 가지부터 손이 닿는 가지는 휘어잡아 똑똑 따내고, 손이 가지않은 윗가지는대나무 장대로 탁탁 쳐대고, 가지 사이로 장대..

소천의 수필 2016.06.30

가슴만 남은 솟대 / 윤소천

우리 집 화단 가장자리, 소나무와 능수단풍 사이에 어린이 키만 한 솟대가 서 있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새를 머리에 인 솟대가 나를 먼저 반겨주는데, 집 마당에 솟대가 들어서게 된 사연은 이렇다. 집을 신축하면서 산 아랫 마을이어서 화목보일러와 기름보일러를 함께 설치했는데,난방은 화목으로 하고 더운 물을 쓸 때는 기름보일러를 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산에서 나무를 해오는 일이 쉽지 않았다. 산림 가꾸기 사업으로 벌목과 가지치기한 나무가지천이지만 옮기는 일이 힘들어서 땔감이 눈앞에 있어도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에게서 아파트단지에 땔감이 있으니 가져가라고 연락해 왔다. 가 보았더니 가지치기를 한 잡목들 틈에 전봇대 만한 소나무 기둥이 십여 개나 있었다. 들여다보니 정교하게 다듬은..

소천의 수필 2016.06.26

가을 뜨락에서 / 윤소천

상강霜降이 가까워지면서 엊그제는 첫서리가 내렸다. 이른 아침 차를 운행하러 나왔다가 창유리에 낀 성에를 긁어내는데 손가락이 얼얼하게 시려왔다. 오후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증암천 수변 공원에 차를 세우고 갈대밭 길을 걷다 코스모스 달맞이꽃 씨앗을 받아왔다. 그리고 집 마당의 봉선화분꽃 금잔화 백일홍 씨앗을 받아 각기 봉투에 넣어 올해꽃씨를 갈무리했다. 마당 모퉁이에 서 있는 해바라기는 까만 씨앗을 품고 자신의 무게에 고개를 숙였다. 해바라기를 볼 때면 끓어오르는 열정을 온몸으로 태우다 간 네덜란드의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생각난다. 그리고 그가 죽지않고 장년의 내 나이가 되었다면 어떤 해바라기를 그렸을까 상상해 본다. 그러자 가을 햇살을 묵묵히 받으며 인생을 달관한 성숙한 모습으로 고개 숙이고 서..

소천의 수필 2015.12.06

어머님의 젖가슴 / 윤소천

​구순의 어머니가 넘어져 가슴에 타박상을 입고 며칠째 고생을 하신다. 의사인 동생에게 가서 치료하자 해도괜찮다 하신다. 소염제 처방을 받고 찜질과 파스를 부쳐 다행히 많이 좋아지셨다. ​한의원 집 손녀로 태어난 진주晉州 정씨鄭氏 어머니는 2남4녀를 두셨는데, 당차고 강한 여장부셨다. 우리 형제 자매들은 의사인 막냇동생만 빼고 어머니에게 꾸중을 많이 들으며 자랐다. 동생은 막내라 귀여워했지만 아버지의 건실하고온화한 성격을 닮아 야단맞을 짓을 하지 않는 모범생이었다. ​아버님은 우리를 다그치는 어머니를 오히려 나무라시며 자식들에게 거친 말이나 손찌검 한 번 하지 않은 분이었다. 딸 많은 집의 외아들로태어난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동학란의 휴유증으로 돌아가시자 가세가 기울어져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내야 했다. ​..

소천의 수필 2013.11.22

무순 언니 / 윤소천

요즈음 아내의 출퇴근길을 도와주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내가 하던 일을 정리하고 잠깐 쉬고 싶다 했는데, 이해하여 주는 아내가 고마워 출퇴근 시간 기사 노릇을 충실히 하고 있다. 늦가을부터 아침에 차를 운행하려면 미리 나와 시동을 걸어 놓아야 한다. 차 앞 유리에 얼어붙은 성에 때문이다.그런데도 깜박 잊을 때가 있다.  이럴 때면 우선 시동을 걸어 놓고 차 앞유리에 얼어붙은 성에를 긁어내야 한다. 요즈음은 이런 용도로 쓸 수 있는 도구가 카센터에 있지만, 이때는 두껍게 언 울퉁불퉁한 얼음표면을 긁어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차를 운행한지 이십여 년이 넘었지만, 화투장을 얻어서 그 면을 세워 긁어대었다. 먼저 운전을 한 친구가 화투장이 편하다 하여 그냥 사용해온 것이다. 이도 없으면 급한 마음에 모아 놓은 ..

소천의 수필 2013.11.22

싱그러운 아침 / 윤소천

창밖의 공기가 산뜻하게 느껴지는 9월의 아침이다. 잠에서 깨면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우고 감사기도를 드린다. 촛불 위로 향이 번지면 예스러운 분위기에 마음이 가라앉아 차분해진다. 아침이면 처음 만나는 것이 길 건너 대숲에 둥지를 튼 새들이다. 새들은 먼동이 트기 시작하면 어느새 지저귀고 있다. 소란스럽기도 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으면 즐겁고 맑은 새소리에 생동감이 느껴진다.  뜰에는 봉숭아 분꽃 맨드라미와 옥잠화 구절초 백일홍이 한창이고연못의 연꽃은 마지막 꽃을 피우고 있다. 무더위와 태풍을 이겨내고 맑은 이슬을 머금고 저마다 피어 있는 싱그러운 아침이다. 꽃은 도심의 공원이나 깊은 산 계곡, 농촌 마을이나 외딴 섬 아무 데나 자리를 잡으면 이물없이 철따라 피고 진다.  전원시인 헤르만 헤세는 그의 시 에..

소천의 수필 2013.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