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의 수필 30

해당화(海棠花) / 윤 소 천

고창 사는 문우가 서해 구시포에 주꾸미가 한창이라며 불렀다. 동호 명사십리를 거쳐 구시포 가는 길은 해변을 따라 시오리길 해당화가 쭉 피어있었다. 솔밭 사이사이 바닷가 모래밭은 진분홍 꽃잎에 노란 수술을 흠뻑 안은 해당화 밭이었다. 하얀 해당화는 찔레꽃보다 더 함초롬하게 피어있었다. 어린 시절 집 마당에도 해당화가 있었는데 장미 같으면서 찔레도 아닌 것이 온몸에 가시가 덮여 있어 꺾지 못했던 꽃이다. 오랜만에 동네 누이를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이었다. 그 후 가끔 동호 바닷가를 찾게 되었는데 그날은 사리 때가 되어 나갔던 바닷물이 세차게 들어오고 있었다. 철석철석 쏴아쏴아 흰 포말을 일으키며 오늘 지내온 바다 이야기를 해당화에게 들려주려는 듯 바삐 들어오고 있었다. 해당화도 바다를 향해 어서 오라 손짓 하..

소천의 수필 2020.07.02

노송(老松)의 기품(氣品)

시내 궁동 예술의 거리는 토요일 마다 장이 선다. 근처에서 고창 사는 선배 문인을 만나 골동품 구경을 하고 화랑에 들렀는데 한 작품에 걸음이 멈춰졌다. 의재(毅齋) 허백련의 늠연한 기품에 서기가 느껴지는 소나무 그림이었다. 나는 담백하며 정중한 듯한 소나무의 서기에 이끌려 있었는데, 좋은 작품을 만나는 것도 인연이라는 선배의 말에 선뜻 사게 되었다. 거실에 걸어 놓았는데 볼 적마다 변치 않은 군자의 절개와 의연한 선비의 기품이 느껴졌다. 이 일을 계기로 그간 잊고 지냈던 동양화에 관심이 다시 생기면서 화랑을 가끔 찾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농(南農) 허건의 노송(老松)을 보았는데 격조 있게 뻗은 가지에 서기가 어려 있고, 철석(鐵石)의 기세로 바늘처럼 솟아난 잎에서 솔향이 나는 것 같은 명품이었다...

소천의 수필 2018.11.19

괴정(槐亭)마을의 회화나무

전남 보성군 복내면 괴정(槐亭)마을은 칠원윤씨(漆原尹氏) 집성촌으로 나의 선조가 수백 년 터를 이루고 살아온 곳이다. 선친 생전에 자주 들르곤했던 덕암제(德菴齊)를 오랜만에 찾았는데 선친이 태어난 이곳 이정표가 유정리에서 옛 이름인 괴정(槐亭)마을로 바뀌어있었다. 가승(家乘)을 만들면서 16대선조의 아호가 *괴정(槐亭)임을 알고 있었는데 이제 그 유래를 알게 되었다. 태어난 지명을 아호로 쓴 것이다. 마을 어귀 회화나무가 있는 집에는 집안의 대모님이 친정집을 지키고 있는데, 오백 년 된 나무로 임금이 벼슬을 한 우리 선조에게 하사하여 심은 나무라 한다. 이 회화나무의 정기를 받아서일까. 이 댁 이찬식 윤창숙 내외분은 우리나라 삼베명인이다. 뒤안 대숲에 대보다 더 높게 자란 회화나무 한 그루가 까치둥지를 ..

소천의 수필 2017.11.20

소쇄원(瀟灑園)에서 / 윤소천

괴정(槐亭) 내가 살고있는 담양 창평에서 가까운 가사문학관 주변은 식영정과 환벽당 그리고 소쇄원이 지척으로 한데 어우러져 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길 건너 옛 창암촌 초입으로 들어선다. 작은 다리를 건너 좌우로 쭉쭉 뻗어 높게 자란 왕대 숲 사이 오솔길로 들어서면 맑은 대숲향이 풍겨온다. 소쇄원(瀟灑園)을 조성한 양산보(梁山甫:1503-1557)선생은 면앙정 송순과 외사촌사이로 어려서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선생의 문하에 들어간다. 일찍이 과거에 합격하지만, 그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이 가까운 화순 능주에 유배되었다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뜨자, 관직에 나가지 않고 평생 고향인 이곳에서 유림의 선비로 살았다. 소년 시절 마을 옆 계곡에서 놀다가 물오리를 따라 지금의 소쇄원이 있는 계곡까지 올라온 적..

소천의 수필 2017.03.11

아리랑이 흐르는 증암천 / 윤소천

증암천의 사계는 싱그럽고 풍성하다. 나무와 새들, 꽃 그리고 풀벌레와 수초, 이따금씩 수면위로 뛰어 오르는 물고기들... 강가에는 세월의 무게만큼 둥글게 닳은 돌들과 쌓인 은모래 톱이 군데군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물안개가 걷히자 말갛게 씻긴 갈대숲이 바람에 일렁일 때마다 햇살을 받아 반쩍이며 물결치고 있다. 무등산 북동쪽에서 발원한 계곡의 물은 소쇄원의 오곡문 흙담장 밑을 흘러온 물과 지실마을 계당을 지나온 실개천이 어우러지고 좌로 환벽당 우로는 식영정을 끼고 흐른다. 그리고 성산의 물과 합수하여 창평 향교 앞을 지나송강정을 휘돌아간다. 이십여 호의 마을이 있는 향교 앞을 지나면서 샛강이 되어 흐르는데 여기 교촌마을이 내가 자주 들르는 곳이다. 강변에 차를 대고 걷다보면 강가에 있는 농가들의 풍경이 ..

소천의 수필 2016.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