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아내의 출퇴근길을
도와주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내가 하던 일을 정리하고
잠깐 쉬고 싶다 했는데, 이해하여
주는 아내가 고마워 출퇴근 시간
기사 노릇을 충실히 하고 있다.
늦가을부터 아침에 차를 운행하려면
미리 나와 시동을 걸어 놓아야 한다.
차 앞 유리에 얼어붙은 성에 때문이다.
그런데도 깜박 잊을 때가 있다.
이럴 때면 우선 시동을 걸어
놓고 차 앞유리에 얼어붙은 성에를
긁어내야 한다. 요즈음은 이런
용도로 쓸 수 있는 도구가 카센터에
있지만, 이때는 두껍게 언
울퉁불퉁한 얼음표면을 긁어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차를 운행한
지 이십여 년이 넘었지만, 화투장을
얻어서 그 면을 세워 긁어대었다.
먼저 운전을 한 친구가 화투장이
편하다 하여 그냥 사용해온 것이다.
이도 없으면 급한 마음에 모아
놓은 남의 명함 몇 장 포개어
긁어대었다.
이날도 날씨는 추운데 옆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하여 급히 긁어댈 것을 찾고
있는데, 이를 바라보던 아내가 별안간
'음악 테이프로 해 보세요.'하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음악 테이프라니
무슨 소리야.'하다가 집히는
것이 있어 곧바로 카세트테이프를
찾아 그 면을 세워 긁어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손에 딱 맞게
쥐어지면서 긁어내는 손놀림도
편해 안성맞춤이었다.
아내를 데려다 주면서 생각하니
참으로 헛웃음이 나왔다. 해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손에 잘
쥐어지지도 않는 화투장으로 손가락이
아프도록 긁어대는 고역을 치렀다는
쓴웃음이었다. 그러다 문득
운전면허만 따놓고 이십 년 장롱면허인
아내의 아이디어는 아닌 것 같아
'누가 그랬어요.'하니까 대뜸 '당신도
몇 번 보았을 텐데, 해곡리 사는 무순
언니요. 이제 운전 배워 동네 만
엉금엉금 다니는 그분이요.'했다.
아내가 평소 친하게 지내는
무순언니는 포도 과수원을 하는
친정에서 시집와 평생
과수 농사를 하며 살아온 분이다.
얼마 전 남편이 세상을 뜨자
혼자 면소재지 나들이를 해야 하는
형편인지라, 어렵게 운전면허를
따서 아직 주차가 서투른
초보운전자였다. 그런데 나는
운전석 서랍에 카세트테이프를
여러 개 가지고 다니면서도,
그동안 써 볼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이런 나에게 그동안 잊고
지냈던 무순 언니의 투박하면서
단순한 지혜가 새롭게
느껴지면서 시골 아줌마였던
무순 언니가
이제 달리 보였다. 그리고
자연에서 평생 농사지으며
때묻지 않은 성실한 삶을
살아온 무순 언니가 누구보다
존경스러웠다.
무순 언니는 인생의
철학과 지혜가 '장자의 수레바퀴
우화'처럼 우리 일상에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 무등수필. 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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