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의 수필

아리랑이 흐르는 증암천甑巖川 / 윤소천

윤소천 2016. 7. 31. 16:02

 

 

증암천의 사계는 싱그럽고 풍성하다.

나무와 새, 물오리와 백로 그리고 이따금 씩

 수면위로 뛰어 오르는 물고기들...강가에는

세월의 무게만큼 둥글게 닳은 돌들과 모래톱이

군데군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물안개가

걷히자 말갛게 씻긴 갈대숲이 햇살을

받아 반쩍이며 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무등산 북쪽 산록에서 발원한 증암천은

독수정獨守亭과 소쇄원瀟灑園 계당

실계천 그리고 원효계곡과 성산星山의

물이 합수하여 영산강으로 흐른다. 무등산

자락의 경관이 뛰어난 여기 가사문학관

일대가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산실이다.

 

푸른 숲에 둘러싸여 있는 환벽당環碧堂과

아래 용소는 환벽당을 세운 김윤제가 어린 정철을

만나 손녀사위를 삼은 곳이고, 그림자가

쉬어간다는 식영정息影亭은 송강松江 정철이 

사미인곡思美人曲 과 속미인곡美人曲을 

지은 송강정松江亭 과 제월봉 아래 면앙정俛仰亭 앞을

흐른다. 송순宋純 은 여기 면앙정에서 가사문학

 촤고의 걸작인 면앙정가 를 지었다. 

 

여기 창평향교 앞 이십여 호 교촌마을은

내가 자주 찾는 곳이다. 강변에 차를 대고 걷다보면

강가의 농가 풍경이 정겹게 다가온다. 골목길

울 너머 마당에 소담스럽게 피어있는 꽃들, 봉숭아

채송아 분꽃 백일홍 수국 그리고 해바라기와

접시꽃.... 강변에서 빨래하는 아낙의 모습과 나무

그늘 정자에서 쉬고 있는 노인들의 모습이

 옛 모습 그대로이다.  

 

바람 부는 봄날 복사꽃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풀잎은 서로 부비며 춤을 추고, 묵은 갈대잎은

엎어지고 제켜지면서 바람결에 씻기고 있었다.

바람따라 내 마음의 시름이 날아가 버린 듯한 이런

날이 나는 좋았다. 강가의 여우털빛으로 바랜 묵은

갈대는 어린 갈대가 올라와 쇨 때까지 버텨주다가,

여름 폭풍우가 지나면 스르르 내려앉아 거름이

되어준다. 흔들리지만 꺾이지 않는 갈대는 그로서

소임을 다하고 사라진다.

 

한 낮의 강가  찾는 이 없어 한가하기만 하다.

백로 한 마리가 인기척을 느끼고 날개를 퍼덕이더니

가볍게 날아올라 건너편 갈대숲으로 사뿐히

내려앉는다. 강변에는 잡초들 사이로 들국화와

달맞이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라보는 저녁노을은 언제보아도 아름답다.

증암천얼비치던 붉은 노을이 점차

묽어지면서 하루가 저물면 강에 사는 생명들도 

저마다 보금자리에 든다.

 

달 밝은 깊은 밤 강변길을 걷다 강 가까이

다가가면 강물은 쪽빛처럼 짙다. 강가에 홀로 앉아

수면에 비치는 달그림자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으면 산 넘어 계곡 깊은 샘으로부터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하는 아리랑이 아련히 들려오는

것 같다. 소천(素泉)이란 나의 필명은 존경하던

선생님이 ‘늘 새롭게 솟아나는 샘'처럼 살라며

 지어주신 이름이다. 

 

적막하기만한 풀숲에 귀를 기울이면 온갖

풀벌레 울음소리 그리고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어떤 물고기의 툼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곳은 꾸미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이

 편안해 내가 자주 찾는 곳이다. 달 뜨는

밤이면 길가 달맞이꽃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아리랑을 읊조리며 강변길을 걷고 싶다.

 

( 한국수필. 202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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