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천의 수필

어머님의 젖가슴 / 윤소천

윤소천 2013. 11. 22. 05:39

 

구순의 어머니가 넘어져

가슴에 타박상을 입고 며칠째

고생을 하신다. 의사인

동생에게 가서 치료하자 해도

괜찮다 하신다. 소염제 처방을

받고 찜질과 파스를 부쳐

다행히 많이 좋아지셨다.

한의원 집 손녀로 태어난

진주晉州 정씨鄭氏 어머니는

2남4녀를 두셨는데,

당차고 강한 여장부셨다. 우리

형제 자매들은 의사인 막냇동생만

빼고 어머니에게 꾸중을 많이

들으며 자랐다. 동생은 막내라

귀여워했지만 아버지의 건실하고

온화한 성격을 닮아 야단맞을

짓을 하지 않는 모범생이었다.

아버님은 우리를 다그치는

어머니를 오히려 나무라시며

자식들에게 거친 말이나

손찌검 한 번 하지 않은 분이었다.

딸 많은 집의 외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동학란의 휴유증으로 돌아

가시자 가세가 기울어져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내야 했다.

집안 일을 도맡아 했던

어머니는 아버지를 세상 물정

모르고 당신의 앞가림이나

겨우 하는 분이라 했다. 이런

아버지와 함께 큰 살림을

꾸리셨던 어머니가 강해질 수

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어머니는 외가 얘기가

나오면 눈물을 보이셨다. 외가는

일제시대 만주로 옮겨 자리잡고

살았는데, 해방이 되어 돌아

오면서 모든 것을 잃고 목숨만을

겨우 부지해 왔다. 이 와중에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변호사인

삼촌이 식솔을 이끌었는데,

그마저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이후 교육계에 있던 다른 삼촌도

여순 사건에 돌아가시어 외가는

거의 폐가가 되다시피 했다.

어머니의 등과 젖가슴에

파스를 붙여 드리면서 웃스갯

소리를 했다. '내가 이 젖을

먹고 컸네요. 이제는 할머니 젖이

다 되었네.'하니까 '그때는 너희들

목숨줄이었다.'하신다. 서울 사는

누나가 일 년이면 두세 번 어머니를

뵈러 오는데, 누나는 '어째서

우리를 숨도 못 쉬게 닦달하고 그랬소.

나는 의붓어머니인 줄 알았소.'

하면 '딸자식은 남의 집에 보내야

하니까 엄하게 가르쳐야 해서

그랬다.'하신다.

어머니의 불꽃 같던 기세가

이제는 많이 수그러들었지만, 아직도

성정은 대쪽 같으시다. 어머니의

성격을 빼닮은 나는 모시고 살며

다투면서 정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도

잘 지냈던 것은 이제 생각하니

모든 것을 감싸 안은 어머니의

사랑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나의 사업 실패와

아버님의 별세 후 힘이 많이

빠지셨다. 평소 정삽하시던 어머니가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하시라 하면, 내가

자식을 잘못 둔 탓으로 며느리들까지

고생시키는데 할 말이 없다 하신다.

이럴 때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돌아보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어머니의 정성스러운 기도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을 해오던

고시공부를 포기하고 교직을 택했다.

그러던 중 건강이 좋지않아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이때가 나에게는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였는데, 어머니는

기대가 무너지는 아픔을 말없이

이겨내면서 가정을 지켜주시고

어렵고 힘든 속에서도 손자들을

돌보아 주셨다.

무심히 흐르는 세월 속에

이제는 집안의 모든 희로애락을

담담히 삭히고 계시는 어머님의

젖가슴. 어느때는 포근하여

넉넉하고, 어느 날은 천둥 번개

우레 같은 기세로 닦달하기도

했던 어머님. 지난날을 돌아보며

어머님의 빈 가슴을

쓸어내린다.

(에세이스트. 2012. 4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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