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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노래 / 황동규

조금이라도 남은 기쁨은 버리지 못하던 해 지는 언덕을 오를 때면 서로 잡고 웃던 해서 눈물겹던 사내여 오라. 우리 같이 흰 흙을 핥던 오후에는 배가 안 고프고 언덕에서 내려뵈던 깊은 황혼 캄캄하게 그 황혼 속을 달려가던 사내여 오라. 겨울날 빈터에 몰려오는 바람소리 그 밑에 엎드려 얼음으로 목을 축이고 얼어붙은 못 가에 등을 들판으로 돌리고 서서 못 속에 있는 우리의 마음을 바라 볼 때 몸과 함께 울던 우리의 옷을 보라.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손 그 떨리는 손에는 네 목을 잡고 머리칼 날리며 빙판에 서서 서로 마주 보며 네 목을 잡고 내 들려주리 쓰러지지 않았던 쓰러지지 않았던 사내의 웃음을. 어둡다 말하면 대답소리 들리는 쇳날을 만지면 살이 떨어지는 그런 떨리는 노래는 이제 우리에게. 서로 붙잡은 우..

읽고 싶은 시 2014.02.23

[스크랩] 英國人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가 그린 90년전의 韓國

마음으로 그린 90년전 한국과 한국인. 엘리자베스 키스 1887-1956 ‘Portrait of Miss Elizabeth Keith’ by Ito Shinsui, 1922 20세기 일본 화단의 대가로 꼽히는 이토 신수이(伊東深水, 1898-1972)가 그린 키스의 초상화 1919 년 엘리자베스 키스라는 호기심 많은 한 영국 여인이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을 방문..

샘터 게시판 2014.02.22

새鳥 아줌마의 편지 / 이해인

항상 새를 좋아하고 사랑해 왔지만 나는 요즘 더욱 새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고, 이젠 단순히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새들의 생태를 살펴보고 연구하는 일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책을 뒤적이게 되었다. 이 모두가 몇 년 전에 알게 된 일본의 와키타 가즈요脇田和代 아줌마 덕분이다. 스스로 새에 미쳤다고 해서 내가 새鳥 아줌마라는 별명을 붙였더니 편지를 쓸 때 마다 새 아줌마라고 쓰고, 늘 대여섯 장 되는 편지를 새 이야기로만 가득 채우는 자칭 아마추어 사진작가 와키타 가즈오 아줌마를 나는 사진으로만 보았을 뿐 아직 만난 일이 없다. 일본어를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나에게 한국에 온 일이 없는 그가 하늘빛, 분홍빛 편지지에 한국말로 써 보내는 정성스런 편지는 맞춤법이나 문법이 어찌나 완벽한지..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 박완서

가끔 별난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치고 싶은 충동 같은 것 말이다. 마음속 깊숙이 잠재한 환호歡呼에의 갈망 같은 게 이런 충동을 느끼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요센 좀처럼 이런 갈망을 풀 기회가 없다. 환호가 아니라도 좋으니 속이 후련하게 박장대소라도 할 기회나마 거의 없다. 의례적인 미소 아니면 조소 냉소 고소가 고작이다. 이러다가 얼굴 모양까지 얄궂게 일그러질 것 같아 겁이 난다. 환호하고픈 갈망을 가장 속시원히 풀 수 있는 기회는 뭐니 뭐니 해도 잘 싸우는 운동경기를 볼 때가 아닌가 싶다. 특히 국제경기에서 우리 편이 이기는 걸 텔레비전을 통해서나마 볼 때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런 일로 신이 나서 마음껏 환성을 지를 수 있었던 ..

가보지 않은 길 앞에서 / 홍윤숙

우리는 왜 가보지 않은 길 앞에 서면 마음 설렐까 그 길에 뜨는 해는 무엇이 다른가 큰 숲에 이르는 작은 숲이 있고 숲길 사이로 냇물 흐르고 냇물 건너 마을엔 어진 사람들 모여 살 것 같은 따뜻한 화덕에 활활 불 피워놓고 낯선 나그네들 융숭히 맞이할 것 같은 그 길 위에 하나의 세계가 다가오고 다가와 눈부신 아침을 열고 해와 달 별들이 새로운 날을 열 것 같은 악보처럼 늘어선 나무들이 어린 풀들 무릎에 안고 춤추는 길 실바람 머리칼 나부끼며 누구나 한번은 가보지 못한 길 위에 서서 세상을 여는 또하나의 열쇠를 가슴 두근거리며 두 손에 쥐어본다 그러나 열쇠는 이윽고 녹이 슬고 그 길도 지나온 길과 다를 것 없음을 희망과 실망은 언제나 손등과 손바닥 같은 허망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읽고 싶은 시 2014.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