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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인의 마음 / 고은

“우리는 시의 육친입니다”라고 내가 말했다. 술이 옴짝달싹 못하게 익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 술의 혈육입니다”라고 그가 말했다. 8월 17일 밤 남산 허리의 하얏트 호텔의 만찬장에 였다. 이산가족 방문단 북쪽 인사들과 서울의 내빈들이 어우러져 만원을 이루었다. 나는 당연히 북쪽 계관 시인 오영재와 한동안 부둥켜안은 몸을 풀지 못했다. 10년 전 남북작가회담의 좌절로 만나지 못한 북쪽 작가 5인 중의 한 사람이던 그를 기억한다. 당시 그가 판문점 회담 장소에 와서 라 는 시를 써서 남쪽 작가 5인의 빈자리를 노래한 적이 있다. 2년 전 15일 간의 북한 편력 중에도, 두 달 전 남북정상회담 수행 때에도 그를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남과 북의 두 시인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속으로만 서로 만나고 싶어..

산 위에서 / 이해인

1. 산을 향한 내 마음이 너무 깊어서 산에 대한 이야기를 섣불리 하지 못했다. 마음에 간직한 말을 글로 써 내려고 하면 왜 이리 늘 답답하고 허전해지는 걸까. 2. 나무마다 목례를 주며 산에 오르면 나는 숨이 가빠지면서 나의 뼈와 살이 부드러워지는 소리를 듣는다. 고집과 불신으로 경직되었던 나의 지난 시간들이 유순하게 녹아내리는 소리를 듣는다. 3. 산에서는 시와 음악이 따로 필요 없다. 모든 존재 자체가 시요 음악인 것을 산은 나에게 조금씩 가르쳐 준다. 날마다 나를 길들이는 기쁨을, 바람에 서걱이는 나무 잎새 소리로 전해 주는 산. 4. 내가 절망할 때 뚜벅뚜벅 걸어와 나를 일으켜 주던 희망의 산. 산처럼 살기 위해 눈물은 깊이 아껴두라 했다. 내가 죽으면 편히 쉴 자리 하나 마련해 놓고 오늘도 조..

읽고 싶은 시 2014.02.03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 도종환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화함 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 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 세상을 흐르는 동..

읽고 싶은 시 2014.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