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739

무소부재(無所不在) / 구 상

아지랑이 낀 연당(蓮塘)에 꿈나무 살포시 내려앉듯 그 고요로 계십니까. 비 나리는 무주공산(無主空山) 어둑이 진 유수(幽遂) 속에 심오하게 계십니까. 산사(山寺) 뜰 파초(芭草) 그늘에 한 포기 채송화모양 애련(哀憐)스레 계십니까. 휘엉청 걸린 달 아래 장독대가 지은 그림자이듯 쓸쓸하게 계십니까. 청산(靑山)이 연장(連嶂)하여 병풍처럼 둘렀는데 높이 솟은 설봉(雪峰)인 듯 어느 절정에 계십니까. 일월(日月)을 조응(照應)하여 세월없이 흐르는 장강(長江)이듯 유연(悠然)하게 계십니까. 상강(霜降) 아침 나목(裸木) 가지에 펼쳐있는 청열(淸烈) 안에 계십니까. 석양이 비낀 황금 들판에 넘실거리는 풍요 속에 계십니까. 삼동(三冬)에 뒤져놓은 번열(煩熱) 식은 대지같이 태초의 침묵을 안고 계십니까. 허허창창(虛..

읽고 싶은 시 2024.01.12

1 월 / 오세영

1월이 색깔이라면 아마도 흰색일게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신의 캔버스, 산도 희고 강물도 희고 꿈꾸는 짐승 같은 내 영혼의 이마도 희고, 1월이 음악이라면 속삭이는 저음일게다. 아직 트이지 않은 신의 발성법, 가지 끝에서 풀잎 끝에서 내 영혼의 현 끝에서 바람은 설레고, ​ 1월이 말씀이라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육성일게다. 유년의 꿈길에서 문득 들려오는 그녀의 질책, ​ 아가, 일어나거라, 벌써 해가 떴단다. 아, 1월은 침묵으로 맞이하는 눈부신 함성.

읽고 싶은 시 2024.01.06

새해의 맑은 햇살 하나가 / 정 호 승

해 뜨는 곳으로 걸어갑니다 새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갑니다 누님 같은 소나무가 빙그레 웃는 새해의 아침이 밝아옵니다 맑은 연꽃대에 앉은 햇살 하나가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당신의 창을 두드리고 아무도 닦아주지 않는 당신의 눈물을 닦아줍니다 사랑하는 일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다시 길을 가게 합니다 어두운 골목 무서운 쓰레기통 옆에 쭈그리고 앉아 이제 더 이상 당신 혼자 떨지 않게 합니다 쓸쓸히 세상을 산책하고 돌아와 신발을 벗고 이제 더 이상 당신 홀로 밥을 먹지 않게 합니다 밝음의 어둠과 깨끗함의 더러움과 배부름의 배고픔과 편안함의 괴로움을 스스로 알게 합니다 때로는 당신 장독대 위에 함박눈으로 내려 당신을 낮춤으로써 더욱 낮아지게 하고 당신을 낮아지게 함으로써 더욱 고요하게 합니다..

읽고 싶은 시 2023.12.31

촛불 켜는 밤 / 이해인

12월의 밤에 조용히 커튼을 드리우고 촛불을 켠다 촛불 속으로 흐르는 음악 나는 눈을 감고 내가 걸어온 길 가고 있는 길 그 길에서 만난 이들의 수없는 얼굴들을 그려 본다 내가 사랑하는 미루나무 민들레 씨를 강 호수 바다 구름 별 그 밖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해 본다 촛불을 켜고 기도하는 밤 시를 쓰는 겨울밤은 얼마나 아름다운 축복인가

읽고 싶은 시 2023.12.30

12월 / 오세영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 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 유성처럼 소리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무를 위해서 꿈이 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 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 안쓰러 마라. 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사랑은 성숙하는 것. 화안히 밝아 오는 어둠 속으로 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 눈 떠라, 절망의 그 빛나는 눈.

읽고 싶은 시 2023.12.28

겨울 사랑 / 박노해

​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 ​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읽고 싶은 시 2023.12.28

성탄 편지 / 이해인

친구여, 알고 계시지요? 사랑하는 그대에게 제가 드릴 성탄 선물은 오래 전부터 가슴에 별이되어 박힌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 안에 꽃피고 열매 맺은 우정의 기쁨과 평화인 것을. 슬픈 이를 이해하고 미운 이를 용서하며 우리 모두 누군가의 집이 되어 등불을 밝히고 싶은 성탄절 잊었던 이름들을 기억하고 먼데 있는 이들을 가까이 불러들이며 문을 엽니다. 죄가 많아 숨고 싶은 우리의 가난한 부끄러움도 기도로 봉헌하며 하얀 성탄을 맞이해야겠지요? 자연의 파괴로 앓고 있는 지구와 구원을 갈망하는 인류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 다시 그대에게 드립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새로이 태어나는 주님의 뜻을 우리도 성모님처럼 겸손이 받아 안기로 해요. 그동안 못다 부른 감사의 노래를 함께 부르기로 해요. 친구여, 알고 계..

읽고 싶은 시 2023.12.23

그 네 / 정호승

너도 그네를 타보면 알거야 사랑을 위해 수평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그동안 네가 수평을 유지해본 적이 없어 한없이 슬펐다는 것을 오늘은 빈 그네를 힘껏 밀어보아라 그네가 중심을 잡고 고요히 수평의 자세를 갖추지 않느냐 너도 너의 가난한 사랑을 위해 수평의 자세를 갖추기 위해 진실해라 너는 한 때 좌우로 혹은 위아래로 흔들리지 않으면 그네가 아니라고 더 높이 떠올라 산을 넘어가야 한다고 마치 손이라도 놓을 듯 그네를 탔으나 결국 그네는 내려와 수평의 자세를 잡지 않더냐 사랑한다는 것은 늘 그네를 타는 일이므로 부디 그네에서 뛰어내리지는 마라 수평인 그대로 고요해라

읽고 싶은 시 2023.12.18